<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17 - 환구단, 조선호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구한말 조선 황실의 위엄을 상징했던 ‘환구단’과 ‘조선호텔’을 찾아가봤습니다.


고종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의 황궁우.
천신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42년만에 환구단으로 돌아온 정문.
우이동 그린파크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어린 시절, 기자의 단골 소풍지는 우이동이었다. 입구에 있는 그린파크 또한 자주 찾던 곳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한 놀이공원이었지만 가난했던 당시만 해도 귀하고 귀한 유원지 중 한 곳이었다.
그린파크로 들어가는 산길엔 한옥풍의 커다란 대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기둥은 ‘술래잡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 때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했고 때론 낮술에 취한 어른들이 살짝 실례를 하고 가기도 했다.
그 대문이 조선말 고종 황제의 위엄을 상징했던 ‘원구단’의 정문이었다는 사실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서였다.

‘둥근 하늘, 모난 땅’

환구단(?丘壇)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으로 원구단(圓丘壇)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이라 해 환구단 역시 둥글게 쌓았다. 사적 157호로 지정된 환구단은 서울시 중구 소공동 웨스턴조선호텔 뒤뜰에 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선 보면 고종이 머물렀던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의 맞은편 쪽에서 찾을 수 있다. 1967년 7월 15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됐다. 대풍을 기원하거나 가뭄에 비를 청할 때도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고려사>에 따르면 제도화된 환구제는 고려 성종(981-997) 때부터라고 전해진다. 조선 초기엔 제천의례를 억제화는 분위기에 따라 세조(1455-1468) 때 폐지됐다가 조선을 대한제국이라 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왕이 아닌 천자가 제천의식을 하던 곳이 바로 환구단이다. 그만큼 대한제국의 독립성과 고종의 위엄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지금의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터에 단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다. 그 뒤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를 1899년 축조했으며 1902년엔 고종 증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돌북)단을 세웠다.


고종 즉위 40년을 맞아 만들어진 ‘석고’


석고 몸통에 새겨진 용 문양


그러나 처음 조성된 단지는 1913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됐다.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대문만이 보존돼 있다.

‘개발’이라는 미명

일제시대를 거치며 철저히 농락당했던 환구단은 그래서 웨스턴조선 호텔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환구단의 옛 모습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침략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철도가 건설되자 외국인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이유 아래 원구단 터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조선철도호텔을 지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1968년 헐렸으며 지금은 현대식 건물인 웨스턴조선호텔이 들어서있다. 환구단의 건물과 터를 관리했던 조선총독부는 환구단을 허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전신이 조선철도호텔인 웨스턴조선호텔과 인근의 한국은행 건물, 미쓰코시 경성점으로 시작한 신세계 건물은 일제시대 수탈과 전횡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어서 함께 둘러보면 좋다.

‘구멍 뚫린 창문’

환구단은 근현대사 과정에서 두 번의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원래 환구단은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천신의 위패를 모시는 황궁우, 어재실, 향재청, 석고각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만 남아있다.


아치 모양 석조 대문에서 본 환궁우


환궁우 창살 문양.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있다.


구멍을 통해 본 환궁우 내부


난간과 처마엔 해태상을 비롯 수호상이 각 층마다 세워져 있다.


1913년 일제가 철도호텔을 세우며 훼손됐고 현대식 건물이 1967년 재건축될 때 또 한 번 크게 손상됐다. 특히 재건축 당시 철거됐던 환구단 정문은 한참동안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07년 8월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된 것이 발견돼 복원 사업이 진행됐다.
서울시는 환구단 정문을 원래 있던 곳으로 옮기려 했지만 이미 조선호텔 정문 앞 도로로 바뀌어 지난해 12월 환구단 시민광장 쪽에 설치했다. 42년만의 귀환이 결국 불완전하게 이뤄진 것이다. 게다가 서울시청과 바로 앞 프라자 호텔이 모두 공사 진행 중이어서 대한문 쪽을 제외하곤 보이는 풍경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서울광장과 대한문을 뒤로 하고 환구단 정문 앞에 서면 왼쪽으로 환구단 시민광장 표지판이 보인다. 정문은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던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이 특징이다.



공사가 한창인 서울시청과 프라자 호텔


대문을 지나 좁은 계단길을 올라가면 황궁우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현대식 호텔의 위엄에 가려져 있지만 나름 운치가 있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 큰 북 모양의 돌조각 3개가 보인다.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만든 석고(돌북)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북을 형상화했다고 하는데 몸통엔 용무늬가 조각돼 있다. 조선 말기의 조각을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한다. 용의 발톱이 3개나 4개가 아닌 황제를 상징하는 5개인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좁은 대문을 지나면 오른쪽 조선호텔 쪽으로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대문을 볼 수 있다. 아치 문양 속으로 보는 환궁우의 모습도 특이하다.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는 고풍스런 목조 건물로 정문을 비롯 창문들이 모두 굳게 닫혀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누군가 호기심에 구멍을 뚫어놓아 내부를 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쯤되면 관람 가능 시간만큼은 차라리 개방을 하는 게 나을 것도 같다.
비운의 황제 고종은 덕수궁에 머물며 황제로서 위엄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환구단을 만들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실제론 대한제국의 부흥을 꿈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운명은 다했고 일제는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환구단 일대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환구단 쪽에서 본 대한문


민족의 아픔이 서린 환구단을 뒤로 하고 떠나는 발걸음은 그래서 가볍지 않았다. 40여년만에 잘못된 자리로 귀환한 환구단의 정문도 같은 마음일지 모른다. 디자인수도를 지향하는 서울시청 공사현장, 우뚝 솟은 두 개의 크레인 위로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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