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지리산 실상사에서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니, 두려운 마음도 커진다. 지은 죄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선생님은 내리는 비를 보고 걱정하셨다. 그러나 이내 그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걱정에 장담하였다. 물론 무슨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직감이다. 환경을 보존하는 일은 직감이 아닌 과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몸에 배였다. 과학보다는 직감이 앞선다. 그래서 낭패를 보곤 한다. 환경을 지키는 일도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15일. 광복절 기념식을 TV로 본 뒤 출발하였다.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통일세를 논의하자는 대통령의 말씀이 가슴에 박힌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과업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 되어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여도 어려운 일이다. 통일세가 통일을 준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일을 위해서라도 삼천리금수강산을 아름답게 보존하는 일이 더욱 더 중요해진다. 환경을 보존하는 일은 일부 소수의 사람만이 실천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국민 모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천해야 한다.



다행이 하늘이 개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쏟아 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개었다. 자연의 오묘함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쏟아지는 비와 번개 그리고 천둥은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파란 하늘이 드러난 지리산을 바라본다.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람이 제 잘났다고 아무리 교만해져도 그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지리산은 숲으로 무성하다. 그럼에도 흘러가는 계곡의 물은 흙탕물이다. 산이 헐벗어 있을 때에는 황토가 씻겨 내려가 황토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산에 나무가 무성함에도 불구하고 흘러가는 물이 황토물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산에 나무를 심고 산을 잘 가꾸었으니, 흘러가는 물도 맑아야 정상이다. 그래도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환경 보존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만수천의 해탈교를 건넜다. 비가 내리지 않을 때에는 흐르는 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비가 내려서 바위가 보이지 않는다. 실상사는 공사 중이어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다른 곳과는 비교되는 일이다. 귀농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친환경의 실상사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곳이어서 뭔가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해탈교를 건너니 반겨주는 것은 석장승들이다. 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는 3기의 석장승은 원래 4기였다. 하나는 떠내려갔다고 한다.



지리산 실상사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증광대사(홍척)가 창건한 9산 산문 중의 하나로 천년 고찰이다. 역사와 함께 지내오면서 많은 굴곡이 있었다. 전란으로 소실되기도 하고, 다시 중창하기를 반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깊은 산속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실상사는 들판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서 특이하다. 원래는 심산유곡이었는데, 개간이 됨으로서 자연스럽게 들판이 되었다고 한다. 실상사는 특히 환경 보존에 앞장서고 있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도법스님의 행보는 사람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귀농학교를 운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상사 농장을 통해 직접 친환경 농사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환경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음을 실천하고 있다. 실상사 농장은 친환경 농법의 모범이 되고 있다. 자연을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직접 실천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당장은 큰 효과가 없지만, 시나브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실상사로 들어가는 길옆은 연 밭이 조성되어 있다. 내 키보다도 더 큰 연들이 무성하다. 초록으로 빛나고 있어 마음을 잡는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초록 향에 취한다. 은은한 연향이 좋다. 세상의 일은 모두 다 뒤로 밀쳐놓고서 그 정취에 취한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원하는 것은 없다. 그 것으로 좋다. 초록이 좋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난다. 물방울들이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욕심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초록의 이파리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그런데 이파리 사이로 고개를 들고 있는 꽃들의 모습은 압권이다. 초록과 대비가 되니, 더욱 빛난다. 하얀 색깔로 우뚝한 백련도 있고, 수줍은 새 색시를 닮은 홍연도 있다. 거기에다 하얀 색깔과 분홍 색깔이 서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꽃도 있다. 삼라만상 저마다 독특한 향을 발하는 것처럼 연꽃의 색깔이 다양하다. 어느 것 하나 뒤떨어지는 것은 없다.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은은한 향에 몸과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연꽃은 8월의 선물이다. 생명 있는 것은 모두 다 때가 있다.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그리고 때가 되면 멀어진다.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꽃은 분명 선물이다. 온 세상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계절이 8월이다. 그 안에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물 때문이다.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뜨거운 열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꽃의 마법이다. 열기가 고통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꿔지는 마법이다.



연꽃이 없는 8월을 생각한다. 견디기 어렵다. 8월의 열기가 있어야 세상은 돌아간다. 8월이 8월답지 않으면 세상은 움직일 수 없다. 뜨거운 열기가 있기에 알차게 채워갈 수 있다. 그러나 8월은 뜨거워야 한다. 에너지가 넘쳐야 한다. 뜨거운 열기로 온 세상을 달아오르게 해야 편안해질 수 있다. 사람은 견디기 힘들지만, 생명 있는 것들에게는 선물이다. 8월이 선물이 있기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곡이 열매를 알차게 맺어야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니 8월의 열기는 분명 선물이 아닌가? 연꽃은 아름다운 선물이다.



선물은 필요한 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다. 개인마다 필요한 것은 다르다.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줄 때 감동이 크다. 실상사 가는 길에 피어난 연꽃은 선물이다. 여름 산사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니, 선물이다. 욕심을 비워낼 수 있게 해주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연꽃을 바라보면서 만남을 생각한다. 이것도 소중한 인연이 아닌가? 선물로 다가오는 꽃을 통해 아름다운 관계를 맺게 된다. 만남과 인연 그리고 관계를 맺게 해주는 꽃이니, 8월의 선물로는 최고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연꽃을 통해 많은 것을 받는다. 여름의 열기가 선물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름 산사를 돌아보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지는 것 또한 선물이다. 아름답게 피어난 여름 꽃들도 선물이고, 부처님의 미소 또한 선물이다. 생각지도 못한 많은 선물을 받게 되니, 그렇게 고맙다.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감사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에 차는 감사의 향에 취한다.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연꽃처럼 우뚝 서고 싶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고 싶다.



상사화는 빨갛게 피어나는 꽃무릇과는 다르다. 연분홍 색깔로 피어나는 상사화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뜻한다. 물론 꽃무릇(석산)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뜻하지만, 개화하는 시기가 다르다. 꽃무릇보다도 한 달 정도 빨리 피어나는 꽃이 상사화다. 실상사의 한 구석에 얌전히 피어난 꽃을 보자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첫사랑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실상사의 친환경 농법도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처럼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더해져 가슴이 뭉클해진다.



실상사는 공사 중이다. 철제 약사여래(보물 제41호)가 모셔져 있는 약사전을 비롯하여 삼층석탑 2기(보물 제 37호) 등이 공사 중이다. 아울러 천년 고찰답게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직영 암자인 백장암에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을 비롯 수철화상 능가보설탑과 탑비(보물 제33, 34호), 부도(보물 제36호), 증각대사 응료탑과 탑비(보물 2-39, 39호) 등이 있다. 산사 전체가 국보와 보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간지럼을 탄다는 배롱나무 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간지럼을 타는 나무를 통해 자신의 허물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친환경 농사법을 실천하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하는 길이고 우리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지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의 미래는 자연을 보존할 때 밝아질 수 있다. 환경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나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로 살아가야 한다. 남의 허물을 눈감아주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 바로 자연을 보존하는 일이다.



실상사에서는 지리산 천왕봉이 눈앞이다. 지리산의 정기가 실상사에 모아진다. 전설에 의하면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는 쇄락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번성한다고 하였다. 물론 사람들의 염원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게 된다면 그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 것이 바로 기도의 힘이다. 실상사의 친환경 농사법이 씨앗이 되어서 환경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져본다. 작은 실천이 모아지면 엄청난 결과로 다가올 것이다. 실상사를 나오면서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였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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