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친히 납시어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왕이 친히 납시어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 승인 2010.09.0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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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18 - 사직단,황학정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서울 도심에 위치한 사직공원을 찾아가봤습니다. 조선 왕실을 상징했던 사직단과 고종의 얼이 서린 황학정 등 볼거리가 많아 반나절 코스로 쉬어가기 좋은 곳입니다.


조선 개국과 함께 태조가 세웠던 ‘사직단’,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를 지냈던 이곳은 종묘와 함께 왕실의 상징이었다.

‘사직단’과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그 대상은 달랐다.
고종이 머물렀던 덕수궁 맞은편에 세워진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던 반면 사직단은 곡식과 땅에 제를 지내는 곳이었다.



사직단 풍경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조선 초기 제천의례를 억제하는 분위기에 따라 환구제는 세조(1455-1468) 때 폐지됐다 고종 때 다시 만들어졌다. 반면 사직단은 조선 초기부터 계속해 자리를 지켰다.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기도 했던 두 곳은 일제 강점기 시절 심각한 훼손을 겪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환구단’은 바로 뒤 조선철도호텔이 지어지면서 상당 부분이 손실됐고 ‘사직단’ 역시 공원을 조성한다는 미명 아래 깊은 상처를 입었다. 

조선 왕실의 상징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사직단은 현재 사직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사직단은 1897년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태사(太社)’, ‘태직(太稷)’으로 높여 부르게 됐지만 일제가 물러난 뒤인 8?15 광복 후에도 수난은 계속됐다. 1962년 도로확장공사 때 사직단 정문(보물 177호)은 본래의 위치에서 14m 가량 뒤쪽으로 밀려났다.
조선시대엔 주례 고공기에 나오는 좌조우사(左祖右社)에 따라 정궁인 경복궁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세웠다. 사직단은 경복궁에서 약 750여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사직단 정문

현재 사직공원 내엔 사직단을 비롯 종로도서관과 시립어린이 도서관 등의 공공건물이 들어서 있고 위쪽으론 활터인 황학정과 단군성전이 있다. 넓은 공터 앞으론 율곡 이이 선생과 그의 모친 신사임당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공원에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낮잠을 즐기는 노인들과 데이트 중인 젊은 연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장난을 치며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사직단의 사(社)는 토지의 신을, 직(稷)은 곡식의 신을 뜻한다. 풍년을 기원하며 인왕산 기슭 사직단에서 매년 봄 가을, 그리고 동지 뒤 납일에 왕이 친히 나가 제를 지냈다. 이런 정기적인 제 외에도 나라에 큰 변란이 있을 때마다 무사를 기원하는 제가 열렸다고 한다.


사직단 부속건물 터


종묘는 한 곳에만 있었지만 농업사회였던 만큼 사직은 도성은 물론 각 지방의 행정단위마다 설치했다. 서울의 사직단은 이 중 비중과 규모 면에서 으뜸이다. 현재 서울 사직단 맞은편엔 ‘주변건물터’ 표지석이 남아 있다.

시민들의 휴식공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말대로 사직단의 모양은 정사각형이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사직단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태조 4년(1396), 궁궐 준공과 함께 사직단도 함께 준공됐다.
단은 양쪽으로 사단과 직단을 따로 설치했는데 사단이 동쪽, 직단이 서쪽이다. 각 단은 한변의 길이가 5장(7.65m)인데 이는 토(土)의 수가 5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높이가 3척(약 1m)인 3단의 장대석은 ‘3’이라는 숫자가 길한 숫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사직단 입구 쪽엔 이곳을 관리하던 사직서 터가 남아있다. 태조 3년(1394)에 세워진 사직서에서 숙직하던 관원들은 5일마다 사직단을 살피고 고칠 곳이 있으면 예조에 보고를 했다. 사직단 한편에 있는 노송들도 인왕산 부근의 절경에 꼽힐 만큼 운치가 있다.
사직공원에서 황학정으로 가는 길은 초행길이라면 헤매기 쉽다. 가장 빠른 길은 신사임당 동상 바로 뒤편에 있는 작은 계단길을 이용하면 된다. 황학정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 왼쪽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세워져 있다.




황학정  사진

황학정(黃鶴亭)은 대한제국 때 세운 정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됐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건평은 59㎡이다. 1898년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일제가 192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조선시대 서울엔 궁술 연습을 위한 장소가 다섯 군데 있었다고 한다. 필운동의 등과정, 옥동의 등룡정, 삼청동의 운룡정, 사직동의 대송정, 누상동의 풍소정 등으로 이를 서촌오사정이라고 불렀다.
오사정은 조선 전기부터 무인의 궁술연습지로 사용됐는데 1894년 갑오경장 이후 활쏘기 무예가 쇠퇴하면서 대부분이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엔 활쏘기를 금지했는데 황학정만 그 맥을 이어왔다고 한다. 지금 황학정이 세워져 있는 곳이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곳이다.
고종은 국민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을 장려해야 한다는 어명을 내려 궁궐안에 황학정을 지었고 이를 일반 국민들에게도 개방했다. 고종 자신도 자주 방문해 직접 활쏘기를 즐겼다고 한다.


‘화살 위험’ 표지판

‘화살위험 입산금지’

당시 고종이 사용했던 전통 등은 황학정에 보관돼 오다 1993년 육군박물관으로 옮겼다. 궁술을 장려했던 고종의 마음 한켠엔 ‘국권 회복’에 대한 기대가 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황학정에 걸려 있는 고종의 모습에서 쉽게 눈을 돌리지 못했다.
대한제국 때까지 남아있던 황학정에선 지금도 궁술 행사가 열리고 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도 중년 남성이 멀리 과녁을 향해 활쏘기를 하고 있었다. 길에서 볼 수 있는 ‘화살위험 입산금지’ ‘활터구간(화살 주의)’ 표지판이 새롭다.



 단군성전


율곡 이이 선생 동상 쪽 뒤론 ‘단군성전’이 있다. 단군성전으로선 국내 최초의 공공건물이라고 한다. 1968년 세워진 단군성전엔 단군영정과 단군상이 모셔져 있다. 안내판엔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는 국조숭모의 참뜻을 새겨주기 바란다”는 당부의 글이 담겼다.



사직공원 풍경


사직단을 중심으로 한 사직공원은 조선왕실의 상징이자 고종의 뜻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실제로 그 의미를 알고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심 한복판에 있어 교통편은 좋다. 경복궁역에서 5분 정도 거리고 광화문에서도 가깝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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