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어느 개의 죽음 앞에서


# 0모양을 만들라고 하면 만들수도 있어


지난 해 11월 눈발이 분분하던 날에 태어난 개 한 마리가 장염으로 사나흘 고생하다가 기어이 생을 마감했다. 감나무 아래 구덩이를 파고 매장을 하려는데 언제 이리도 많이 커 버렸나 싶게 무겁기가 한이 없다. 하긴 살아 있다면 녀석이 내 품에 착 안겨들며 혀를 내밀고 껄떡거리는 방식으로 힘을 빼주기 때문에 그토록 무겁지는 않을 것이다.


# 개가 묻힌곳

녀석이 만일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적어도 사흘 정도는 여러 사람들의 일정을 복잡하고 바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개로 태어난 까닭에 단 한 명의 조문객도, 복잡한 무슨 절차도 없이 너무도 간단하게 매장이 끝나고 말았다. 삽으로 서른 번 정도 흙을 팠고, 수의도 뭣도 없이 알몸 그대로 구덩이에 넣은 다음 파낸 흙을 원래 있었던 자리에 도로 채워주는 방식의 그토록 간단한 매장을 끝내고 나니 비로소 가슴에 못이라도 박힌 듯 아릿아릿하더니 끝내 빗줄기를 뿌리고 만다.


# 니들 쌍꺼풀 수술했니


# 파시스트와 자발이


개란 무엇인가. 개를 생각하며 개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나, 사람이란 또 무엇인가.
제 꼬리를 물려고 돌고 또 돌다가 픽 쓰러지는 것을 취미처럼 하던 녀석이었다. 일본의 문학 장르 중에 하이쿠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딱 맞는 작품 하나를 녀석이 만들어주기도 했다. 개가 제 꼬리를 잡으려고 빙빙 돌다가 쓰러진다, 하고, 이렇게 쓰기만 하면 그냥 작품이 되는 그런 문학 작품을 녀석이 나로 하여금 쓰게 했던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생각할수록 간단하지가 않다. 두고두고 곱씹어 볼만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다른 생각을 낳기 때문이다.
개가 제 꼬리를 잡으려고 빙빙 돈다. 입을 쩍 벌리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안타까워 미치겠다는 듯이 뭐라고 낑낑 소리를 질러가며 제 꼬리를 따라간다. 꼬리를 따라가다 보니 전체적인 모양은 빙빙 도는 꼴이 된다. 그렇게 그는 돌고 또 돈다. 마치 개 자신이 지구가, 우주가 되어버린 형국이다. 아 미치겠네, 바로 눈앞에 있는 저것이 왜 이렇게 안 잡히는 거야. 그러다가 픽 쓰러진다.
돌고 있는 지구 속에서, 우주 속에서 역시 돌고 있는 개, 안 쓰러질 수가 없다. 원심에 원심을 더하고 또 더하고 자꾸 더하다 보면 마침내 폭발하기 마련이다. 폭발하지 않으려면 쓰러져야 한다. 그래야 산다. 살기 위해서, 폭발하지 않기 위해서 쓰러진 개, 그가 만일 사람이라면 쓰러진 직후에 아마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 왜 이렇게 어지러운 거야.


# 아유 지루해


# 세상에 나온직후


그렇게, 잠시 쓰러진 상태 그대로 어지러움을 잠재운 개는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뒤를 본다. 꼬리가 있다. 뭔가 모르게 반갑다. 그 반가운 꼬리가 흔들린다. 개 자신이 꼬리를 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그 꼬리가 낯설어 보인다. 혹은 신기해 보인다. 저게 뭐지? 왜 자꾸 저러는 거야. 해서 다시 그것을 잡아보기로 결심하고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든다. 그러나 역시 꼬리는 잡히지 않는다. 금방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는다.
꼬리를 잡아보고자 하는 심사는 아마도 궁금함일 것이다. 너 왜 그래. 왜 자꾸 흔들거려,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 아니 어쩌면 개는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더 잡아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신체의 어떤 부분에 살짝 힘을 가했을 뿐인데 흔들리는 꼬리가, 그 구조가 궁금해서, 그래서 해부학적인 관찰을 하고 싶어서 일단 잡아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쪽이 되었건 제 꼬리를 잡고자 하는 개의 안타까운 몸부림은 거룩하다. 그리고 장엄하다. 이런 개는 사람을 보고도 그 사람이 낯설고 만만해 보인다 해서 함부로 짖거나 하지를 않는다. 짖기는 짖되 냉큼 달려가서 물어뜯겠다고 날뛰는 등의 자발을 떨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외부의 변화보다 내부의 변화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개라고 해서 다 같은 개는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면서 뭐냐고, 누구냐고 묻고 싶어서 그 꼬리라도 잡고자 하는 개는 흔하지 않다. 사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철학자 중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그런 주제로 평생을 살았다. 이른바 ‘코기토’로 유명한 사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외쳤던 서양의 데카르트를 아마 첫 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만일 내게 데카르트의 일생을 한 컷의 그림으로 완성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 제 꼬리를 잡으려고 빙빙 도는 한 마리의 개를 그려낼 것 같다. 불손할까? 무례일까? 사람을 개에 비유하다니, 하고 몰매를 맞게 될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특히 데카르트의 직계 후예들이, 그 중에서도 선생의 이름에 밥줄을 걸고 있는 제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정작 데카르트 자신은 빙그레 웃고나 있을 것이다. 웃다가 아마 박장대소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박장대소는, 생전에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의 생애는 물론 사후로도 최초의 커다란 웃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철학을 드디어 완성했다고 개에게 감사장을 주어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아무튼지 그렇다. 그랬던 녀석이 죽었다. 나로 하여금 일본의 하이쿠와 데카르트를 새삼스레 다시 더듬어보게 했던 녀석이 장염으로 죽었다. 그 녀석의 이름이 관심이었다. 이름을 짓기까지의 과정을 반추하노라면 내 가슴에서 다시 비가 내린다.
태어난 직후에는 모두가 고만고만해서 특성을 알 수 없었다. 젖을 뗄 즈음부터 저마다 특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녀석은 자기가 무리들 중에서 대장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으르렁거렸다. 다른 한 녀석은 권력 따위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외곽을 돌며 가끔 하늘이나 보고 있었고, 또 한 녀석은 누가 옆에서 소리만 크게 질러도 깨갱깨갱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대며 꼬리를 감추고 주저앉는 식의 전형적인 청순가련형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녀석은 아무 소득도 없이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니며 소리나 질러대고 있었고, 또 다른 한 녀석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다리를 접고 앉아 한참씩이나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유년기의 관심이



# 이거모야 내가 눈을 뜬거야


이렇게 드러난 저마다의 특성에 따라 이름을 짓기로 했는데 촉새, 자발이, 파시스트, 덤덤이, 울보, 관심이 등등 평소에 달리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름들이 술술 저절로 나와 주었다. 그 중에서도 관심이는 유별나리 만치 조용한 녀석이었다. 조용한데도 쉽게 눈에 띄는 특이한 녀석이었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고개를 또릿또릿 갸웃거리면서 귀를 쫑긋쫑긋하면서 눈을 잇달아 깜빡거리다가 크게 뜬 채로 한참씩이나 그것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런데 그것이 철부지 어린 시절에 잠깐 빛을 내다가 사라지는 습관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유,소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접어들었어도 관심이의 사물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던가보다. 불교 특히 선불교에서는 ‘개에도 덕성이 있느냐’는 화두를 들고 병 속의 새를 보듯이 몇 달 몇 년을 들여다보기도 한다지만 사람 세상이나 개들의 세상이나 세상은 다 같은 세상이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관심이는 그런 식으로 내게 해주었던 셈이다.
그랬던 녀석이 죽었다. 그것도 어이없는 장염으로 죽었다. 주인이 아무 것이나 자기가 먹는 것을 너도 먹으라고 던져주었던 까닭이었다. 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고 했던가. 하긴 나의 그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상대의 존재조건 같은 것은 싹 무시한 채 내 기분에만 취해서 아무 것이나 되는 대로 먹을 것을 던져준 것이니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사람의 내장과 개의 내장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다소 무리이기는 하지만, 무리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사람에게 있어 장염은 결코 죽을병까지는 아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머니처럼 달고 다니는 게 장염이다. 그런데 개는 단 한 번에 열에 아홉은 생명을 잃어버린다. 먹일 만한 약도 없거니와 있다 해도 거의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다.
인간을 상대로 하는 의료기술과 제약기술은 날로 달로 진보를 한다지만, 동물을 상대로 하는 그것은 아무래도 보수적인 것 같다. 생명을 대하는 과학문명의 이중잣대라고나 할까. 하긴 과학이란 본디 서양에서 꽃을 피운 학문이었다. 그리고 서양의 생명에 대한 관점은 인간이 절대적 우위였고, 여타의 모든 생명은 인간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생명이면서도 생명이 아닌 그 무엇이었다. 이름하여 자연정복, 나아가서는 인간정복, 이 도저한 정복의 사상 위에서 자본주의가 일어섰다. 과학은 이 자본주의의 행동대장 격이다. 그러니 모든 생명을 같은 무게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겠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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