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고궁 나들이 1 창경궁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부턴 조선 시대 국가 경영의 중심지였던 고궁들을 둘러봤습니다. 그 첫 순서로 경복궁과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졌던 창경궁을 찾아가봤습니다.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 전경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만 한다면 기자는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 세대다.
일제가 놀이공원으로 조성하며 한 때 창경원으로 격하됐던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 등이 들어서며 서울 시민들의 대표적인 나들이 장소로 사용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600여 년 전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했다.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했다.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그 중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였다. 서울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다섯 궁궐이 있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한 장소였다.

“작지만 아담한 궁궐”

이들 궁궐과 종묘는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였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며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해 검소함을 소중히 여겼다. 이런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 내 궁궐 중 가장 먼저 창경궁을 찾은 것은 정궁 중에서도 가장 아담하고 실용성 있게 지어져 그 구조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종은 창경궁을 단장하며 경복궁, 창덕궁에 비해 효율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옥천교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 보다는 아름다은 경관을 지닌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좁아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효성이 지극했던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게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 세웠다. 때문에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 볼 땐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았지만 중요한 기본 규조는 모두 갖추었다.

자연과 하나된 배치

1483년(성종14) 수강궁 터에 창건된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뒤 이후 광해군 때 중건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동궁인 저승전과 내전 일대가 소실되기도 했으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과 양화당 등이 소실됐다.
1633년(인조 11) 통명전과 양화당 등이 다시 지어졌지만 1790년(정조 14) 통명전이 소실되기도 했다. 1830년(순조 30(엔 환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내전 일대가 소실돼 재건됐다. 일제시대엔 일제가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조성하며 심하게 훼손했다. 벚꽃나무가 대량으로 심어져 봄나들이의 대표적인 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이 과정에서 1911년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1983년 창경궁으로 환원하며 본격적인 복원 공사가 시작돼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성종의 의도대로 지어진 창경궁은 기본적으로 경복궁, 창덕궁에 비해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지어져 자유로운 분위기다.
창경궁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궁궐과 달리 남향이 아닌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이 동쪽을 향하고 있고 관청 건물인 궐내 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만이 남쪽을 향해 있다.
이는 동쪽만 평지이고 남,서,북 쪽이 모두 구릉인 지세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통치의 목적 보단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특징이다.
때문에 창경궁엔 왕들의 효심과 사랑, 세장의 어린 시절 얘기, 왕비와 후궁들의 갈등 등 얘깃거리가 풍부하게 전해지고 있다. 장희빈이 궁궐에서 쫓겨난 것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운명을 마친 곳도 모두 이 곳에서의 일이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론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있다. 일제 시대 도로를 만들며 창경궁과 종묘 사이가 끊어졌지만 앞으로 복원될 계획이다.

‘친히 쌀 나눠주던 곳’

홍화문을 정문으로 하는 창경궁은 조정에 이르는 문의 수도 적고 외전의 규모도 아담한 편이다.
크게 왕과 신하가 국가를 다스리던 ‘외전’과 왕실 여성들의 주생활 공간인 ‘내전’으로 구분된다.


문정전


숭문당


일월오악도


함인정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 가운데에선 가장 오래됐다. 명정전 주위엔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문정전, 독서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자리잡고 있다.
명정전과 문정전 실내에 있는 ‘일월오악도’(해와달, 다섯 개의 봉우리)는 조선시대 왕실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왕이 있는 어느 곳이든 함께 해 그 권위를 알렸다. 영조는 문정전 앞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며 칼을 던졌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남대문 방화범이 불을 질렀던 곳이기도 하다.
창경궁 외전이 전체적으로 동향인 것과 달리 문정전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왕의 혼례는 조선시대 중요한 국가 의례 중 하나였는데 정전인 명정전에선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가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이는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로 자세하게 전해진다.
모든 궁궐 마당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 산과 짝을 이뤄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일부러 낸 물길이라고 한다.
이를 ‘금천’이라 부르는데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불렸으며 ‘옥천교’가 놓여졌다.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무지개 사이엔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모든 궁궐의 금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옥천교만이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돼 있다.
조선시대엔 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이 흔치 않았지만 창경궁은 비교적 개방적인 곳이었다. 영조는 정문인 홍화문 앞에서 백성들에게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직접 물었고, 효성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눠줬다고 한다.

‘남대문’ 방화범 ‘문정전’도

창경궁은 성종의 효심에서 탄생한 궁궐이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둘째아들로 작은 아버지인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13세로 나이가 어려 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경춘전 통영전 양안당 집복헌과영춘헌

창경궁은 왕실의 웃어른으로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어머니인 예종 비 안순왕후 등 세분 대비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마련됐다.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은 내전의 중심 공간으로 규모가 크다. 전각 옆에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이 있으며 뒤뜰엔 꽃계단이 마련돼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답답한 궁중생활에 지친 왕비를 달래주기 위한 것이다. 장희빈이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사약을 받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통명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영역엔 대비,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여러 전각이 모여있다.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다. 정조는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아들 순조를 낳았고 순조가 태어난 집복헌에서 순조의 돌잔치를 열었다. 집복헌은 순조의 탄생, 돌잔치, 관례, 책례 등이 모두 이루어져 순조와 인연이 깊다.
내전 앞으론 궁내 각 시설들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작은 숲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 중 상당수는 일제가 놀이공원을 조성하면서 강제로 철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백송’과 ‘회화나무’
 
창경궁은 기본적으로 창덕궁과 별개의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창덕궁의 후원을 함께 이용했다. 현재 궁내 작은 호수인 춘당지는 실제론 창경궁의 후원이 아니라 일제가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이다.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이었다. 지금의 춘당지 자리는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라는 논이 이었다.


춘당지


일제는 이를 파혜쳐 큰 연못으로 만들었고 1983년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했다. 춘당지는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넓은 연못으로 주변의 숲도 울창해 많은 새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정조는 아버지 세도세자를 위해 창경궁 건너편의 함춘원에 있던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고쳐짓고, 경모궁이 잘 보이는 언덕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는데 통명전의 뒤쪽 언덕이다. 현재에는 터만 남아있다. 경모궁을 수시로 참배했던 정조는 경모궁으로 이동할 때 번거롭지 않도록 홍화문 북쪽에 월근문을 냈다. 조선시대 창경궁 앞은 낮은 산이었는데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세우면서 헐었다.
춘당지 뒤편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건축 뼈대는 목재와 철재로 이어졌고 외피는 온통 유리로 덮여 있다. 대온실은 일제의 불손한 의도 아래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그 자체가 역사적 가치와 건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현재 대온실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과 야생화, 자생식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대온실 건물과 앞쪽 작은 정원은 사진을 찍기에 좋다.
창경궁 내엔 두 개의 석탑이 있다. 내전 근방에 있는 이름 없는 석탑과 춘당지 인근 ‘팔각칠층석탑’(보물 1119호)이 그 것이다. 둘 모두 창경궁과는 직접 적인 관련이 없다. 일제시대 ‘볼거리’를 위해 이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성종 태실과 태실비

대온실


선인문


성종 태실과 태실비, 해시계, 풍기대, 관천대, 함춘정 등도 빼놓아선 안 될 볼거리들이다. 춘당지 백송과 선인문 부근 회화나무도 눈길을 끈다.
창경궁을 다 돌아보고 정문으로 나오면 창덕궁까지 이어지는 돌담길을 걸어보자. 덕수궁 돌담길보다 한적해 사색하며 걷기 좋다. 가을이면 낙엽이 쌓여 한층 더 고즈넉하다. 중간에 있는 ‘선인문’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말자. 장희빈이 궁궐을 나간 문이자 사도세자가 갇혔던 뒤주가 바로 이 곳 뒤였다고 한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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