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궁궐 나들이 2 창덕궁,후원 첫 번째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호부턴 조선 시대 국가 경영의 중심지였던 궁궐들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선 창덕궁과 후원을 돌아봅니다.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창경궁 정문 돈화문


국보 246호인 <동궐도>. 1820년대 후반에 그려진 동궐도는 창덕궁(사적 122호)과 창경궁을 둘러싼 주변 지세와 전각, 담장, 각종 기물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궐 내부에 심어진 나무 까지도 묘사돼 있어 두 궁궐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동궐도

동궐도의 중심을 이루는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궁궐로 경복궁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고 한일병합을 결정했던 ‘비운의 장소’ 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중전인 순종효황후, 마지막 황태자 영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모두 창덕궁에서 생활에서 생을 마쳤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창덕궁은 동쪽에 자리 잡은 궁궐이라 해 창경궁과 함게 ‘동궐’로 불렸다. 처음엔 경복궁을 보조하는 궁궐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보다 먼저 복구돼 명실상부한 조선의 법궁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 궁궐 중 임금들이 가장 오랫동안 거처했던 곳도 바로 이 곳이다.


금천교와 진선문


옆에서 본 금천교


경복궁이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궁궐로 위엄과 권위가 돋보인다면 창덕궁은 궁궐의 기본 격식과 규모를 갖추면서도 자연 속에 조화롭게 깃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랑을 받았다. 경복궁이 비교적 평지에 자리잡은 반면 창덕궁과 창경궁은 자연의 지형지세를 그대로 살리면서 최소한의 손길을 더해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경복궁의 전성시대를 세종대왕이 이끌었다면 창덕궁은 조선 후기 부흥을 이뤘던 정조의 꿈이 깃든 곳이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해 인재를 모았다. 왕과 신하들이 부용지 주변을 함께 거닐며 시를 짓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창덕궁은 자연환경과 탁월한 조화를 이룬데다 궁궐 건축과 전통 정원의 원형을 잘 갖춰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

창경궁과 맞붙어 있는 창덕궁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을 만큼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다. 창경궁의 입장료가 일반 성인의 경우 1000원인데 반해 규모가 큰 창덕궁은 3000원이며, 후원은 별도로 5000원을 더 내야 한다. 본격적으로 고궁을 돌아볼 생각이면 한달 동안 후원을 비롯 서울시내 다섯 개의 고궁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1만원권 티켓을 추천한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아기자기하게 배치돼 있다.
창덕궁은 1392년 조선 건국 후 1405년(태종 5)에 궁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뒤 이어 후원이 조성됐고 금천교와 돈화문 등이 차례로 건립됐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소실되는 아픔을 맞는다.
1610년(광해군 2) 재건됐지만 1623년(광해 15) 인조반정으로 전각의 대부분이 다시 불에 탔다. 이후 중건 작업이 진행됐으며 1776년 정조가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했다. 1803년(순조 3) 소실됐던 인정전은 이듬해 재건됐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는 성난 군중이 창덕궁에 침입하기도 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는 고종을 관물헌에 모셨다.

‘가장 오래된 다리’


송학선 의사 의거터

창덕궁 앞쪽으론 송학선 의사 의거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1926년 순종의 승하에 울분을 토하던 송 의사가 금호문(창덕궁의 서문) 앞에서 조선총독을 살해하려던 자리였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보물 제383호로 지정돼 있다. 1412년(태종 12)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재건했다. 현재 있는 건물의 앞쪽은 도로포장공사로 지면이 높아지면서 약간 묻혀 있다.
정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인 돈화문은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초기엔 2층 문루에 동종과 북이 걸려 있어 시간을 알려줬다고 하는데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정문의 명칭인 ‘돈화(敦化)’는 중용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 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돈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 궁궐 정문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돈화문 일대에서부터 종로까지는 원래 관청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돈화문을 지나 창덕궁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300~400년된 회화나무 여덟 그루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돈화문 주변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이곳에 조정의 관료가 근무하는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를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회화나무는 종종 학자의 기개에 비유됐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돈화문 옆 회화나무


억석루

오른쪽으로 보이는 다리는 1411년(태종 11) 축조된 금천교다. 조선 궁궐은 모두 입구 쪽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다. 특히 창덕궁의 돌다리는 그 물이 맑아 비단 금(錦)을 사용했다. 다리 아래 남쪽엔 해태상, 북쪽엔 거북상을 배치해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 다리 중간엔 잡귀를 쫓는 귀면이 조각돼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금천교 앞으론 정전인 인정전(국보 225호)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진선문이 보인다. 본래는 일직선상에 있었지만 진선문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살짝 어긋났다고 한다.

일제의 훼손과 만행

인정문으로 들어가기 전 정문 맞은 편에 있는 궐내각사를 먼저 둘러보는 것이 좋다. 창경궁에도 궁궐의 보조기능을 담당하는 각사가 있었지만 대부분 남아있지 않고 현재는 소나무숲으로 변했다. 창덕궁의 궐내각사 역시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부분 소실된 것을 2005년 복원했다.


‘구중궁궐’이 실감나는 궐내각사


규장각


검서청

창덕궁의 궐내각사를 둘러보면 왜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나왔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여러 겹의 담으로 미로처럼 얽혀져 있다. 국립도서관 격인 규장각과 정치를 보좌하던 홍문관,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 건강을 담당하는 내의원, 서적을 점검했던 검서청, 책을 보관하던 책고 등이 대표적이다.



구 선원전


약방

선원전(보물 817호)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조선 왕조는 궁궐 밖엔 종묘를, 궁궐 안엔 선원전을 두어 조상을 모셨는데 임금이 자주 다례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를 지냈던 장소였기에 다른 건물과 달리 현판이 없는 게 특징이며 오른쪽 작은 건물은 제사 때 쓰던 제기를 보관하던 곳이다.
훗날 일제가 후원에 새로 선원전을 지으면서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됐다. 왕실의 권위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던 일제는 이 앞에서 의도적으로 군사 훈련을 하는 등 옛모습을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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