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상사화


# 당귀

몇 년 전 도시에 사는 어떤 이에게 몇 종류의 꽃모종을 보내면서 상사화 알뿌리 하나를 딸려 보냈었다. 많이도 아니고 달랑 한 뿌리였다. 이게 양파처럼 생겼지만 절대 양파는 아니니까 혹시라도 양파로 알고 날름 먹어 치우지 말고 잘 심으라는 쪽지와 함께 그것을 보냈더니 전화가 왔다. 이게 뭐냐고 묻는데 장난기가 슬쩍 발동해서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뻗대고 말았다. 그랬더니 몇 개월 뒤에 다시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이랬다.

“세상에, 그냥 심으라고 해서 심어놓고 잊어 버렸는데 글쎄 이게 뭐야. 뭐가 새초롬하게 나오길래 너 뭐니, 뭐야 응? 하고 묻기를 며칠이나 했더니만 오늘 보니까 이게 상사화 같네, 맞지요? 상사화.”

그래, 그렇다. 상사화는 그 꽃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조금만 상상을 해보면 금방 상사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고 이어서 아하, 이게 상사화구나, 하게 되어 있다. 도무지 생기라든가 핏기라고는 없어 보이는, 색깔은 분홍 계통이면서도 분홍 특유의 꿈꾸는 환(幻) 같은 것도 찾아볼 수가 없는, 그리움에 애가 닳고 마르고 지쳐서 내일이나 모레쯤 덜컥 죽어버릴 것만 같은 꽃 상사화.


# 마당에 핀 백련

이 녀석은 겨울이 가고 봄이 되어 수선화가 화사하게 바람에 살랑거릴 무렵이면 저도 뭔가 굉장한 꽃이라도 금방 피어낼 듯이 왕성하게 이파리를 내놓는다. 다육식물처럼 두툼한 초록빛 이파리가 너무나도 씩씩하고 당당해서 정말이지 금방 무슨 대단한 꽃이 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웬걸, 아침마다 저녁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여다보지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낮 기온이 점점 상승하는 5월 말쯤이면 노랗게 마치 우거지처럼 변색이 되면서 하나하나 픽픽 쓰러져 버린다. 때문에 상사화를 처음 심어보는 사람은 “오매 이것이 죽어버렸네”하고 크게 상심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죽어버린 것 같았던 녀석이 삼복염천 푹푹 삶아대는 날씨 속에서 갑자기 땅을 밀고 나온다. 참고 또 참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참을 수가 없는데 무슨 화장을 하고 무슨 치장을 하겠냐는 듯이 사람으로 치자면 맨얼굴 그대로의 꽃봉오리가 바로 쑥 나오는 것이다. 갑자기 조용하게 나타나서 꽃대를 쓱쓱 밀어 올리는 상사화의 꽃피는 장면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일단 그 장면을 발견했다 하면 여느 꽃을 대할 때처럼 아 꽃이구나, 하고 무심하게 넘어갈 수는 없으리라.


# 핼쓱하면서도 도도한


# 언제든 박차고 뛰쳐나갈듯이


내 경우를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어려서부터 상사화를 보아 왔고, 지금도 마당에 백여 구 이상의 상사화를 두고 있지만, 꽃대가 땅을 밀고 나올 즈음이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철렁, 철렁 소리가 들린다는 느낌으로 한동안 멍해지곤 한다. 그 돌연함과, 그 당돌함과, 그 조용함과 그리고 핼쓱함이라고 밖에는 표현이 잘 안 되는 일종의 형용모순 앞에서 느껴야 하는 충격이라고나 할까. 이것은 아마 개인적인 체험, 아니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날개도 아닌 것이 좌우대칭으로


# 어느날 갑자기 땅을 쑥~

외할머니께서 깊은 산속 절간의 공양주를 하시다가 나중에 어찌어찌 주지 비슷한 소임을 맡게 되셨던 까닭으로 나는 유,소년기를 거의 절간에서 살다시피 했다. 절간 이름이 은사였는데 이 절간이 들어선 산을 올려다보는 형태로 늘어선 마을 이름 또한 은사였다. 한자로는 숨을 은(隱)자에 선비 사(士)자로, 조선왕조 말기 천주교인들이 살해의 위협을 피해 숨어 산 것을 계기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했다.
숨어 살면서도 공부를 깊이 하고자 했던 어떤 사람이 마을 앞 산속에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이 초막이 나중에 무당의 굿당이 되었다가 다시 암자로 확대 개편되었고, 그러고도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외할머니께서 이 암자의 주지 비슷한 소임을 맡게 되신 거였다. 이 절간의 한쪽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앞에는 향기도 좋은 당귀꽃이 하얗게 바람을 타는 작은 텃밭이 있었고, 뒤편으로는 커다란 배롱나무 밑으로 상사화와 꽃무릇이 섞여서 제가끔 피어나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화단과 연못 사이의 커다란 바위에 언제부터인지 여자가 앉아 있기 시작했다. 그랬다. 그녀는 그때 확실하게 여자였다. 여인이라고 부를 만한 나이는 분명 아니었다. 바른 기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나이가 아마 열여섯이나 일곱 즈음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바위에 앉아서 가끔 한숨이나 길게 내쉴 뿐 말 한 마디 예쁘게 하는 법이 없는 그녀는 새로 절간 일을 보아주기 시작한 공양주 보살의 따님이었다.

햇수로 치자면 아마 2년 정도, 날수로 치자면 아마 100일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적어도 십 년 정도는 그 바위에 앉아서 하늘에 손톱자국을 내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만큼 그녀의 표정과 앉은 자세가 내게 충격을 주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정말이지 그때의 그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찌나 서글퍼 보이고 어찌나 절망스러워 보이던지 말 한 마디 붙여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누나, 누나 하면서 잘도 따라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누나가 갑자기 나 같은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사내아이라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고 연못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입술이나 질근질근 깨물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누나의 엄마는 그녀에게 “저년이 어디로 무슨 도둑질 나갈 궁리를 하나보다”는 둥, “봐서는 안 될 남의 비밀을 훔쳐보는 미친년 같다”는 둥 거친 욕설을 바가지로 퍼부어대고 있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으로 날마다 조금씩 핏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 시기에 해인사 강원을 갓 수료하고 와 있었던가 어쨌던가, 하여튼 청년 스님 한 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 젊은 스님이 언제부터인가 염불에도 잿밥에도 다 관심이 없다는 듯 낚시를 다니고 있었다. 아침 일찍 낚시도구를 챙겨 절간을 나섰다가 밤도 이슥해서야 들어오곤 했다. 먹지도 못할 물고기를 잡아다가 어쩌자는 것인지 연못에 한 마리 두 마리 넣기 시작한 물고기가 종당에는 연못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신도들 중에 남자들이 가끔 양동이로 건져가기도 했지만 물고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청년 스님이 물고기 화두를 잡고 정진하는 중이라고 아주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하고 있었고 신도들도 모두 다 그렇게 믿었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아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하여튼 내 눈에는 하늘에 보이지도 않는 손톱자국을 내고 있는 누나의 핏기 잃은 얼굴과 물고기낚시를 직업처럼 하고 있는 청년 스님의 살이 쭉 빠진 얼굴이 어쩐지 자꾸 한 세트로 묶여져서 보이는 것이었다.


# 연못 속에 수련


# 연못에는 역시 얘들이 있어야

뭘 모르면 잘 보인다고 했던가. 하지만 보면서도 자기가 보는 것이 무엇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개념정리가 안 되고 혼란은 가중된다. 그러니까 나는 그 무렵에 청년 스님과 누나의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일종의 무지개다리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셈이었다. 물론 그것은 감각이고 직관일 뿐 누구에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청년 스님과 누나가 서로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스님은 아침 일찍 절간에서 십 리도 넘는 저수지로 낚시를 가 버리는데 누나가 은사 마을의 자기 집에서 아침을 지어먹고 절간에 도착하는 시간은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서였다. 그리고 누나는 해가 지기 전에 자기 엄마의 욕을 먹어가며 가끔은 머리채까지 잡혀서 끌리다시피 집으로 돌아가고, 그들이 돌아가고 한참 뒤에야 청년 스님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한 스님과 누나는 그때까지 서로 무슨 말 한 마디 나눈 적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드러나 있는 사실관계가 이렇게 엄연한데도 나는 어쩐지 그들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물론 지금도 그때 그들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어쨌든 그들은 햇수로 2년, 날짜로 치자면 100일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서로 자신의 피를 말리고 태우다가 어느 하루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칠팔 년쯤 지난 뒤의 어느 날 서울에서 누가 보았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소위 하꼬방이라고 하는 판잣집 단칸방에서 아이를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낳고 둘이 살고 있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이 소식을 서로가 질세라 경쟁적으로 바람처럼 빠르게 전달하며 무릎을 치고 어쩌면, 세상에 어쩌면, 하고 감탄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하나도 놀랍지 않고 다만 의혹이 풀렸다는 해방감이나 느끼고 있었다.


# 도란도란

삼복염천에 불쑥 도발적으로 피어나는 꽃 상사화에 관한 내 개인적인 개념은 아마 그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상사화를 보면서 내가 느끼고 상상하는 상사병은 무슨 체념이나 운명에 대한 순응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며불며 자신의 피를 태우고 말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장문의 유서를 쓰고 또 쓰는 유형의 상사병이 아니었다.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자신의 눈알이라도 빼버릴 듯이 몸부림을 치는 것도 아니고, 아침 창문에 비켜드는 햇살이 무서워서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자신의 발등을 찧는 유형의 것도 아니었다.
하지 말라고 한다. 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왜 안 된다고 하는 것이지? 등등 이런 의문을 끌어안고 남몰래 몸부림을 치다가 어느 날 홀연히 박차고 일어서는 것, 그리하여 다소는 민망하고 초라하나마 자신의 생각을 세상 속 어딘가에 말뚝이라도 박듯이 단단하게 심어놓고 이것이 나다, 나 자신이다 하고 외치는 것. 이것이 내가 상사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후기-상사화가 느닷없이 막 피어나서 행복원 이야기는 뒤로 미룹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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