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궁궐 나들이 2 창덕궁,후원 두 번째


# 왕비의 침소였던 창덕궁 대조전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창덕궁을 돌아봤습니다.


# 대조전 옆 흥복헌.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창덕궁에서 정문인 돈화문을 거쳐 정전인 인정전에 이르려면 금천교와 진선문, 인정문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같은 ‘동궐’을 이뤘지만 창덕궁과 창경궁의 규모와 배치의 차이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창경궁은 흥화문과 옥천교를 지나면 곧바로 일직선상에 회랑과 명정전이 있다. 여기서 홍화문과 명정전은 보기 드물게 모두 동향이다.
반면 창덕궁의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은 궁궐의 전형적인 특징인 남향으로 지어졌다. 돈화문을 지나 인정전까지 가기 위해선 금천교와 진선문, 인정문을 차례로 지나야 한다. 그만큼 창덕궁의 규모와 경계 수준은 그 역할 만큼 창경궁보다 한 수 위였다.


#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조선 후기 ‘오얏꽃 문양’

진선문의 문턱은 조선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조심하지 않으면 걸려넘어지기 쉬울 정도로 높다. 진선문을 지나면 긴 회랑이 양쪽으로 배치돼 있는데 과거엔 이 곳에 호위대 주둔소와 창고 등 궐내각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다리꼴로 만들어진 행각 마당은 불규칙한 지형과 규칙적인 궁궐 양식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세종조의 건축가 박자청의 솜씨라고 한다.


# 왕의 위엄을 상징하듯 진선문의 높은 문턱


왕실의 공식 행사가 열리는 정전은 모든 궁궐의 중심이다. 때문에 규모나 위엄에 있어서도 다른 건물들을 능가한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조회 뿐만 아니라 즉위식과 외국 사신 접견 등 큰 행사가 열렸다.
인정전(국보 225호)은 경복궁 근정전에 비해선 소박한 규모지만 정전으로서의 위엄을 잘 갖추고 있다. 창경궁의 명전전이 자연지세에 맞게 아담하다면 인정전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감을 준다.
인정전의 용마루에 있는 오얏꽃 문양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장식으로, 1897년 이후부터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됐다. 궁궐에 맞지 않게 어색한 내부의 커튼과 샹들리에는 1908년 인정전 내부를 고치면서 궁궐에 들여온 서양식 실내 장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선정전 입구 선정문

청기와를 얹은 선정전은 왕이 평상시 업무를 보던 편전이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전각인데, 청기와는 다른 재료에 비해 많은 비용이 든다고 한다. 광해군이 인정전과 선정전에 청기와를 이도록 지시하자, 사관이 사치한 궁궐을 조성하는 조치라며 비판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 인정전과 선정전 내부



왕세자 머물던 ‘성정각’

희정당(보물 815호)과 대조전(보물 816호)은 각각 왕과 왕비의 일생상활 공간인 침전으로 사용됐다. 희정당은 나중에 침전보단 편안안 업무 공간으로 더 많이 활용됐기 때문에 건물의 이름도 ‘전’보다 아래 서열인 ‘당’이다.


# 희정당 내부


# 세자가 머물던 동궁 인근


몇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시대인 1917년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지은 것이다. 앞면 11칸, 옆면 4칸으로 한식 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회의실과 응접실을 비롯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어 사용됐다.
서양식 바람으로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자동차 진입로를 갖추고 있어 건축의 변천사를 엿보는 데 중요한 자료다.
왕비가 늘 거처하는 대조전의 뒷마당은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꾸민 것은 왕비의 단조로운 궐내 생활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왕비의 생활 장소엔 이처럼 무료함을 달래줄 수 있는 작은 후원이 만들어졌다.
대조전에선 성종을 비롯 인조, 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났다. 여러 차례 화재를 당한 후 지금 있는 건물은 1920년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을 헐어 옮겨지은 것이다.
대조전 옆 흥복헌은 복을 일으킨다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국권을 넘겨준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던 ‘비운의 장소’다.
왕비가 지냈던 침전 동쪽엔 왕세자의 공부방이었던 성정각이 있는데 일제시대엔 내의원으로 사용했다. 후원으로 가는 길엔 헌종이 승화한 중회당이 있는데 인근에 작은 건물들이 오목조목 모여있다. 육각 누각인 삼삼와, 칠분서, 승화루는 복도로 연결돼 있는데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됐다.

한옥에 청나라 양식

창덕궁 한켠에 자리잡은 낙선재와 석복헌은 한 여인에 대한 헌종의 깊은 사랑이 담긴 곳이다. 세자를 얻기 위해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한 헌종의 마음은 지극했다고 한다. 경빈 김씨를 무척 아껴 함께 지낼 새 보금자리로 이들 전각을 새단장하거나 새로 마련했다.


# 헌종이 즐겨찾던 낙선재  


# 순원왕후의 거처 수강재 

낙선재는 원래 상중에 있는 왕후들이 소복 차림으로 기거하던 곳이어서 단청도 하지 않았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헌종은 낙선재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며 쉬었다고 한다.
석복헌은 ‘복을 내리는 집’이란 뜻으로 세자를 얻기를 바랬던 마음이 담겼다. 석복헌과 수강재 사이의 뒷문에 장식된 포도 문양도 자손을 얻고자 하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맞이한 뒤 약 2년 만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수강재는 1785년(정조 9)에 지었으며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 자리에 세워져 수강재란 이름이 붙었다. 순조 27년(1827)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의 별당이었으며 1848년(헌종 14) 헌종의 할머니였던 순원왕후의 거처로 사용되며 중수했다. 낙선재 창살 무늬와 건축 양식은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는데 한옥풍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진다.


# 낙선재 입구


# 낙선재 인근의 아기자기한 모습


# 낙선재 인근 배치도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는 최근까지도 조선 왕실의 후손들이 사용했던 곳이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중전인 순정효황후가 석복헌에서 생활했고, 낙선재에선 고종의 넷째아들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수강재에선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생활했다.




계단식 꽃밭과 괴석 등으로 만든 작은 뒤뜰 동산은 후원으로 연결돼 있다. 낙선재 일대는 복원 작업을 마친 후 2006년부터 공개됐다. 낙선재 옆으론 창경궁과 후원으로 각각 연결되는 길이 이어져 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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