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행복원 이야기(2)


# 빨래줄이 떨어진 줄 알았더니...

멀리서 봤을 때 그것은 도무지 신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운동장 옆 잔디 위로 길게 늘어선 그것은 사실 신발과는 그 이미지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처음에는 빨랫줄이 끊어져서 땅에 떨어진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끊어진 빨래줄 치고는 너무도 가지런하고 질서정연해서 차라리 도발적으로 느껴졌다.
저게 대체 뭐냐? 스스로에 묻고 또 물어대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알았다. 안 뒤에는 믿어지지 않아서, 믿을 수가 없어서 한참을 서 있었다. 원 세상에, 신발을 이렇게 말릴 수도 있다니. 이렇게 널어서 이렇게 말릴 수도 있다니.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밖에는 별 방법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여기저기 아무 데나 휙휙 던져놓고 말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이었다.


# 누구일까


#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도 나는 신발들을 그렇게 일자로 쭉 늘어놓고 말리는 그 장면이 신기하고 대단하게만 보이는 거였다. 도대체 이게 누구의 발상인가. 누가 신발을 이렇게 널어놓을 생각을 했는가. 마르셀 뒤낭의 소변기가 문득 생각나기도 했다. 오래된 소변기 하나 달랑 떼어다가 미술관에 전시해놓고 샘이라고 이름을 붙인 그 유명한 소변기 말이다.
보면 볼수록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또한 보면 볼수록 무엇인가 자꾸 생각할 게 있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볼 수 있도록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힘이라 하는 것이겠지만, 진정한 예술이나마나 내게는 그 이상의 적나라한 진실도 없어 보였다. 행복원의 내부사정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해보라는 과제가 만일 주어진다면 나는 아마 수십 켤레의 신발들이 햇살 아래 나란히 늘어서서 공평하게 말라가고 있는 그 한 장의 사진으로 과제 끝, 하고 낙낙하게 돌아서서 휘파람을 불게 될 터이었다.
아무튼 잔디 위에 널려진 신발들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그 소년이 생각났다. 내가 먼저 뭐라고 아는 체를 하면 틀렸다는 듯이 냉큼 숨어 버리던, 그리고는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서 허벅지를 살그머니 어루만지다가 살짝 꼬집어대며 히, 하고 웃는 방식으로 나로 하여금 그 녀석의 모든 것을 다 알아버렸다는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지게 했던, 내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 소년의 히죽이 웃은 얼굴이 신발들 사이에서 어른거렸다.
아, 여기에 어쩌면 그 녀석의 신발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으로 천천히 한 걸음씩 옆으로 이동하며 신발들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내 모습을 누군가 보고 있었다면 퍽이나 수상스럽게 생각했을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성실하게 살펴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갸웃거리는 진지한 미술학도 같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랬다. 이름도 모르는 그 소년을 한 번 본 뒤로 나는 그 녀석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진지해지는 새로운 버릇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는 생각을 못했거나 했다 해도 관념적으로 대충 정리하고 넘어갔던 일들이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며 떠올라오곤 했다. 그러니 이것은 뭐랄까. 이름도 모르는 그 소년이 어느새 내게 한 사람의 스승이 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정말이지 그는 나로 하여금 온갖 것들을 온갖 각도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고 고민하게 하는 이상한 에너지를 주고 있었다.
이를테면 단군할아버지와 내가 만약에 꿈속에서라도 만난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의사표현을 할 것인가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 시대에 단군할아버지가 사용한 언어와 지금의 내가 쓰는 언어는 분명히 다를 터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단군할아버지에게 나의 궁금증을 물어볼 것인가. 그리고 단군할아버지는 어떤 기능으로 나의 질문을 해독하고 어떤 방식으로 답을 할 것인가.
물론 의사소통의 문제는 비단 시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났다 해도 알래스카나 혹은 아프리카쪽 사람을 만났을 때 그와 나는 평상의 언어로는 단 한 마디도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공간에서 태어난 경우는 어떨까. 시간과 공간의 조건을 다 충족했다 해서 의사소통의 문제도 덩달아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일까.
과학에서 말하는 언어장애라든가 지적장애 같은 용어들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천 마디 만 마디 주절주절 정신없이 늘어놓아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한 게 현실이고 보면 의사소통의 핵심은 시간이나 공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진정성의 문제라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석가모니와 가섭이 단 한 차례의 몸짓만으로 수천 수만의 단어로도 해결할 수 없는 뜻을 주고받았듯이 말이다.
지도교사는 그 소년에게 지적장애가 있다고 했다. 때문에 그는 입으로 하는 말보다 몸으로 하는 말이 훨씬 자연스러웠고 효과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를 처음 만나던 그날 내 허벅지를 살살 어루만지다가 꼬집었다. 그 꼬집음 속에 소년의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물론 그런 일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더러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꼬집음과 꼬집힘 사이에 놓이는 교감이라는 이름의 다리를 인식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 꼬집히는 순간 나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뭐 이런 느물한 애가 다 있나 하고 인상을 확 찡그리며 가만히 살짝 소년의 손을 쳐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 순간의 나는 그 어떤 거부도 반항도 없이 그 꼬집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은 꽤 아픈 꼬집음이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본능적인 뿌리침조차도 없이 가만히 있어준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작용이었던 것인가.
그 신비함의 정체가 궁금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웠다. 약속도 인사도 없이 얼떨결에 헤어지고 만 애인에 대한 마음이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약속도 없고 인사도 없이 얼결에 헤어지고 말았다지만 그들이 정말로 애인이라면 어디선가 반드시 만나게 되지 않겠는가. 때문에 나는 행복원을 찾아갈 때마다 그 소년을 생각하면서도 누구에게 묻지는 않았다. 이러이러한 용모를 가진 아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이름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다.
뭔가 극적인 풍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알아서도 안 되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맺어진 어떤 약속이, 묵계가 있었다. 때문에 함부로 아무에게나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만 은밀하게 그 소년을 찾아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찍자 마요 안 되요~


그날 지도교사에게 생활관 내부 사진을 몇 장 찍고 싶다는 청을 넣은 것도 사실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생활관 내부를 들어가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생활관이란 말 그대로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지만 사실상 침실이라고 봐야 한다. 타인의 침실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전제만으로도 호기심이 엄청 발동하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선뜻 발을 들여놓기에는 무엇인가 뒤에서 잡아당긴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 한참 보고 있으면 뭔가 느낌이 있다.


# 사람 많은 곳에는 필수


다행히도 생활관은 원룸이나 투룸 형식이 아니라 일반 주택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거실이 있고, 화장실과 방들이 각각의 문을 갖추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주택 형식이었다. 거실마다 빨래가 세탁소처럼 빼곡하게 널려 있고, 방학 중이라 아이들이 대부분 실내에 있었다. 아이들이 실내에 있다는 것은 그 소년을 찾기에 더 이상의 좋은 조건도 없는 셈이기는 했지만, 속옷과 겉옷이 뒤섞인 채로 널려 있는 빨래를 통해 느껴야만 하는 은밀함이랄까, 그 적나라한 사생활이 풍기는 어떤 것이 나를 자꾸 움츠러들게 하고 있었다.


# 거실마다 빨래가 널려 있는데...


# 뭐예요, 무슨 조사 나왔어요?



게다가 제법 나이 든 한 소년이 지도교사에게 묻는 나직한 목소리가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뭐예요? 어디서 무슨 조사 나온 거예요?” 그 질문에 지도교사는 즉각 “아니야, 너희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시다 해서”하고 정리를 해주기는 했지만 내 입장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요즘의 사회복지시설은 대부분 국가의 재정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고 보면 이런저런 감사니 조사니 하는 명목으로 불시에 사람이 들이닥치는 경우가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마치 죄인처럼 한쪽에 몰려선 채 눈치를 살피곤 했을 터이었다.
이렇게 되면 사진을 찍는다고 여기저기 들여다보는 것이 커다란 무례일 수 있었다. 침실까지 보자는 얘기는 아예 입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어서 빨리 나가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서둘러 생활관을 나왔다. 지도교사와도 헤어져서 혼자 이곳저곳 외부를 둘러보고 있는 참인데 놀이기구 쪽에서 한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는 약 100미터 정도, 시력이 그닥 좋지도 않건만 나는 대번에 그 소년을 알아보고 달려갔다.


# 아이들이 떠난 뒤에...


“아유 이놈아, 너 어디서 오는 거야? 미끄럼 타고 오는 거야?”
소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이나 보고 있더니 한순간에 있는 힘을 다해 후다닥 달아나 버리고 있었다. 오, 이 녀석은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는구나. 극심한 배신감으로 치를 떠느라 멍청하게 쭈그려앉아 있기를 5분이나 했을까, 10분이나 했을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거려지고 있었다. 이게 소년과 중년의 차이인 것이겠지 하고 그렇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