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궁궐 나들이 2 창덕궁, 후원 세 번째


# 후원 북쪽 옥류천. 임금과 신하가 이 곳에서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창덕궁 뒤편 ‘후원’을 돌아봤습니다.


#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이었던 규장각과 주합루.


창덕궁에서 세자들이 머물렀던 ‘성정각’과 순조의 사랑이 담긴 ‘낙선재’ 사이엔 넓은 길이 뚤려 있다. 두 곳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인데 오른쪽은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길이고, 왼쪽은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별도의 입장료 5000원을 더 내야 한다. 정해진 시간과 인원이 있기 때문에 다소 여유있게 움직이는 게 좋다. 최근엔 일본인 등 외국인 등을 대상으로 방문 횟수를 늘렸다.

창덕궁의 60% 차지

창덕궁은 궁궐의 면모도 아름답지만 특히 아름답고 넓은 후원 때문에 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었는데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존덕지 같은 연못을 만들고 옥류천 주변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등 아담한 규모의 정자들을 세워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꾀했다.





# 후원에 위치한 다양한 정자들. 애련정-부용정-관람정-청의정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가끔 호랑이나 표범 같은 맹수가 나타나기도 했을 만큼 깊고 울창한 삼림을 갖췄다. 게다가 절경들은 골짜기마다 숨어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으므로 직접 걸어서 찾아다녀야만 후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향하는 숲길은 후원 산책 중에서도 가장 있기 있는 코스였다.
후원은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왕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 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엔 왕이 참석하는 군사 훈련이 자주 실시됐고 활쏘기 행사도 열렸다. 대비를 위한 잔치나 종친 또는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도 베풀어졌다. 성종 때엔 불꽃놀이도 했으며 왕이 후원에 직접 곡식을 길러 농사의 어려움을 체험했다. 왕비도 친히 누에를 쳐서 양잠을 장려했다고 한다. 부련지 부근의 뽕나무도 그 중 하나인데 천연기념물 제471호로 지정돼 있다.




# 특별한 나무들. 400년된 뽕나무와 750년 수령의 향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맨 우측은 길에서 발견한 버섯.



수령이 400년 정도로 뽕나무로선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한다. 왕비는 누에를 치며 양잠의 신인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는 잠례를 거행했다.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둔 사대부 집처럼 지었으며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후원의 정취를 더한다.

궁궐내 사대부 집

후원 입구에서 무리를 지어 올라가는 길은 한 때 ‘비원’으로 불리기도 했던 ‘후원’의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아스팔트 길이 조금은 정취를 방해하지만 왕이 뒷짐을 지고 다녔을 길을 간다는 기대가 적지 않다.



# 연경당

후원의 주요 건물 중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연경당’이다. 왕이 거닐던 후원에 사대부 집 형태의 가옥이 있다는 게 의외다. 정면 6칸, 측면 2칸, 단층팔작지붕집으로 1828년(순조 28) 진장각 옛터에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남향이다.
‘연경당’을 나와 조금만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작은 목조 건물이 보인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가 애련지 남쪽에 지은 ‘기오헌’인데 ‘의두합’으로도 불린다. 순조의 맏아들이었던 효명세자(1809-1830)는 총명하고 인품이 높아 18세에 이미 순조를 대신해 정치를 지휘하다 22세에 요절한 비운의 인물이다. 효명세자의 죽음을 놓고 많은 말들이 떠돌기도 했다.



# 효명세자의 공부방이던 ‘기오헌’. 오른쪽에 세운 건물은 궁궐 내
가장 작은 건물이다.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여러 시설물을 후원에 지어 새로운 정원을 만들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치를 구상했다. 그가 공부방으로 사용했던 ‘기오헌’(의두합)은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독서와 사색을 위해 궁궐에서 유일하게 북향으로 지었다. 기오헌 오른쪽엔 궐 안에서 가작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 있는데 한 눈에 봐도 아담하다. 기오헌 뒤쪽 계단에 있는 작은 문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과 열람실인 주합루로 이어진다.

민본사상 담은 ‘어수문’

다음 코스인 ‘부용지’와 ‘주합루’는 조선 후기 부흥을 이뤄냈던 정조의 꿈이 서린 곳이다.
이 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지로 휴식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했던 비교적 개방된 곳이었다. 주합루 근처의 규장각과 서향각은 왕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에선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곤 했다.


# 영화당. 때로 과거 시험이 열렸다.

개인적인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부용정, 행사를 위해 지어진 영화당은 모두 연못에 인접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형상이다. 주합루는 정조 원년인 1776년에 창건된 2층의 누각 건물이다.
아래층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을, 위층엔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한 산실이었다. 이를 위한 정책 개발과 도서 수집 등 연구 기관으로 설립됐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수많은 정적들로부터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써 위대한 군주가 됐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엔 ‘어수문’이란 작은 문이 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뜻으로 군주들이 항상 민심을 생각해야 한다는 통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한다. 정조의 ‘민본사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주합루를 둘러싼 울타리는 ‘철병’이라고 불린다. 조선시대 독특한 조경기법으로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다.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가림막’ 역할과 함께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도 한다.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를 바탕으로 대나무틀을 사용해 재현했다.
부용지를 둘러싼 건물들은 제각각 아름답기도 하지만 연못과 어우러져 절묘한 경관을 만들어낸다.

아름답고 다양한 ‘정자들’

다시 애련지를 지나면 400년이 넘은 뽕나무와 존덕정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존덕정 인근은 관람정, 펌우사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 아름다운 경과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어수선한 분위기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후원 절경의 으뜸은 ‘옥류천’ 일대다. 후원 북쪽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이라 하는데 1636년(인조 14)에 조성했다. 소요함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흠을 파고, 샘물을 끌어올린 다음 작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임금은 이 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뛰우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소요함엔 인조가 쓴 ‘옥류천’이란 글씨와 숙종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옥류천 주위엔 청의정, 소요정, 태극정, 농산정, 취한정 등의 정자를 세웠다.
옥류천에서 잠시 쉬고 나면 내려가는 길이다. 신선원전과 750년된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를 지나면 다시 창덕궁 정문 쪽에 이르게 된다.


- 다음 호부턴 `경복궁` 편이 이어집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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