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꽃무릇과 해바라기

꽃무릇과 산사의 여유

대웅전 앞이 환하다. 색색의 등불이 나란히 걸려 있다. 등마다 사람들의 서원을 적은 종이가 춤을 춘다. 화엄세상이란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함께 하면서도 각각 개성을 발산하는 모습이 마음에 와 닿는다. 서로가 통제를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자유로운 모습이다. 형형색색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화엄의 정수는 아니다. 화엄의 정수는 겉으로 드러난 색깔보다 내면이 중요하다. 여름 산사의 앞마당에 걸려 있는 등들의 모습이 화엄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개성과 조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모습이 마음을 잡는다. 사람 사는 세상도 저리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의 꽃, 꽃무릇을 찾아 산사를 찾았다. 꽃무릇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뜻한다. 이 때쯤이면 피어 있을 것이란 기대감으로 전북 고창의 선운사를 찾았다. 때마침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름 하여 고창 수산물 축제. 시골의 옛정을 진하게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비가 오락가락한 탓인지, 축제를 찾은 사람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거기에다 기대하였던 꽃무릇도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사랑의 열정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데 꽃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때가 있는 법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서두른다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내린 비로 인해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는 냇물이 정겹다. 산사 계곡에 물이 항상 저만큼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하다. 산사의 가을을 재촉한다. 세상일이 흐르는 물처럼 걸림 없이 풀렸으면 좋겠다. 명절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산사를 휘감고 흘러가는 냇물의 모습이 가슴에 와 닿는다. 시원스러운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사천왕문에 들어서니, 만세루가 반겨준다. 만세루에는 꽃무릇을 기리는 시화전이 열리고 있다. 고창문인협회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서 전시회를 펼치고 있다. 만세루와 대웅전(보물 제 290호) 사이의 마당에 등들이 걸려 장관을 이룬다. 오색의 등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에서 진한 감동을 맛본다. 화엄세상이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을 위해 실천하며 살면 그 곳이 바로 화엄세상이다.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그 곳이 바로 화엄세상이다. 영롱한 등불 아래에서 나의 화엄세상을 열어본다.
산사를 돌아 나오는데, 눈에 들어오는 꽃이 있다. 아직은 때가 일러 꽃이 피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예 포기하고 있었다. 사랑의 꽃이라 쉽게 볼 수 없을 것이라 단념하였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빨간 꽃. 반갑다. 사랑하는 님을 되찾은 것만큼이나 좋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꽃대 위에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면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우아하다. 어쩌면 저리도 고울까?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울까? 보아도, 보아도 곱기만 하다.



선운사의 꽃무릇은 장관이다. 산사 전역에 피어난 꽃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한 두 송이가 아니다. 산사 전체가 온통 붉은 빛이다. 그만큼 꽃무릇은 무리를 지어 피어난다. 군락을 이루고 있기에 더욱 더 돋보인다. 소나무 아래는 물론이고 돌무더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고개를 내밀고 피어난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의 모습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아직 때가 일러 절정기는 아닌 것 같다. 조급한 마음을 참지 못한 친구들이 이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채 꽃을 피어내지 못하고 꽃봉오리를 내밀고 있다. 그 중에 홀로 활짝 피어난 꽃들이 화려함을 자랑한다.
꽃무릇의 꽃에는 이파리가 없다. 급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파리보다 먼저 꽃대가 올라온다. 연록의 꽃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다. 그 힘이 얼마나 우렁찬지, 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듬뿍 느낄 수 있다. 하늘 높이 솟구친 꽃대 위에 한 개나 두 개의 꽃봉오리를 맺는다. 꽃봉오리는 이내 가느다란 꽃 이파리를 활짝 피어내고 그 사이를 사랑의 끈으로 장식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아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지극정성을 다하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게 꽃이 지고 나면, 초록색의 이파리가 나온다. 꽃과 이파리가 만나지 못한다고 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상징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꽃에는 꽃무릇과 상사화 그리고 백양꽃이 있다. 이들은 모두 수선화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꽃과 이파리가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통칭해서 상사화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꽃무릇과 상사화는 분명 다른 꽃이다. 꽃의 모습도 다르고 개화하는 시기도 다르다. 꽃무릇보다 한 달 여전에 피어나는 꽃이 상사화다. 꽃무릇은 빨간 색이지만 상사화는 연분홍이다. 간혹 노란 상사화도 있다. 이들은 다른 종이지만, 꽃과 이파리가 만나지 못하는 것은 공통점이다.




산사에서 사랑의 꽃을 보니, 새삼 욕심이 커진다. 무리지어 피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는 모양이다. 꽃을 찾지 못하였을 때에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로 포기하였다. 그런데 꽃을 보게 되니, 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을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화엄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을 한지가 바로 전인데도, 그새 욕심을 부리는 나를 발견하고 실소한다. 사랑의 꽃무릇을 보면서 만족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군락을 이룬 꽃을 보기 위하여 한 번 더 찾으면 되는 일이다. 꽃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다. 산사의 여유를 간직한 채로 돌아섰다. 

해바라기

널따란 얼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는 꽃을 닮고 싶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오직 한 곳만을 응시하는 올곧은 태도가 숭고하다. 절실한 마음으로 오랜 시간 기원을 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을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소원하는 마음이 꽃 이파리에 그대로 드러난다. 얼마나 원하였으면, 저리도 노랄 수가 있단 말인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였으면, 저리도 동그래질 수가 있단 말인가? 노란 해바라기를 바라보면서 진실로 원하면,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해바라기, sun flower다. 해님만을 바라보는 꽃이다. 해님이 좋아서, 해님만을 바라본다. 해님을 사랑하여 해님만을 따라간다. 오직 한 마음이다. 다른 곳은 아예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지치지도 않는가 보다. 그만큼 바라보았으면 목이 아플 법도 하다. 그만 포기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꽃은 목이 부러지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해님만을 바라보고 있다. 상처를 입어도 상관하지 않고, 사랑을 이루지 못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하는 해님만을 바라본다. 일편단심이다.



나를 본다.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욕심이 허망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였다. 모든 것이 다 바람이다. 탐욕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실재하는 것은 없다. 단지 인연에 의해 나타나는 허상을 좇고 있을 뿐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욕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튼튼한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버리면 편안하다. 버리면 행복해진다. 그런 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한다. 아니 버릴 수가 없다. 꼭 해님을 포기하지 못하는 해바라기를 닮았다. 어리석은 일이다.



욕심을 탐할 때에는 절실하다. 그 것을 취하지 않으면 영원히 후회할 것이란 절박감으로 안달이 난다.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취하게 됨으로서 낭패를 본다. 한 두 번이 아니다. 쉴 사이 없이 반복하면서도 그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다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바람이란 사실을 알고 그 것을 놓아버리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 것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해님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를 닮았다. 그런 해바라기의 뒷모습은 추하다. 살아 있는 생명들 모두가 다 그렇다. 살아 있을 때의 화려함은 얼마가지 못한다. 생명을 다하게 되면 악취만 진동할 뿐이다. 지수화풍이 인연을 따라 모아졌다가 흩어지면, 남는 게 없다. 추한 해바라기의 뒷모습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해님을 사랑하는 모습에는 모두가 부러움의 시선을 던진다. 본직을 망각한 채 말초적인 즐거움을 지향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해바라기를 보면서 버릴 것은 빨리 버려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결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공이다. 나 자신마저도 있지 않다. 무아다. 나조차 실재하지 않는데, 다른 것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시각적으로 감지되는 환상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인연과 연기에 의해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해진다. 욕심을 버리면 된다. 마음을 비우면 된다. 그러면 순간순간이 행복이다. 살아 있음이 축복이고,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다. 해바라기가 곱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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