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으뜸 궁궐의 위엄이 서린 곳
조선 왕조 으뜸 궁궐의 위엄이 서린 곳
  • 승인 2010.10.0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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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궁궐 나들이 3 경복궁 첫번째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동궐’을 이룬 창경궁과 창덕궁에 이어 이번 호부턴 조선왕조의 제일 궁궐인 경복궁을 둘러 봅니다.


# 지난 8월 광복절에 새로운 얼굴로 선보인 광화문.
일제가 훼손했던 광화문은 이날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함께 문을 연 조선 왕조 제일의 궁궐이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는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 가장 먼저 경복궁 건립에 들어갔다. 때문에 경복궁은 역사가 가장 오래됐을 뿐 아니라 규모도 크고 격식도 매우 엄격하다.


#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에선 남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도심 전경


경북궁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에 둘러싸여 있고 그 중심에 청계천이 흐르는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입지를 고를 때부터 좋은 땅은 좋은 기운을 불러들인다는 생각에 매우 신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왕과 왕의 가족들이 머물렀던 곳이었던 만큼 나라에서 으뜸가는 규모와 당시로선 최고의 기술로 지었다.


# 광화문 광장에서 바라본 경복궁. 뒤쪽이 북악산이고 왼쪽으론
청와대가 보인다.

‘큰 복을 지닌 궁궐’

왕의 신하들과 나랏일을 돌보고 왕실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어서 필요한 적각이 많았다.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이들이 이루어내는 공간은 창건 당시부터 매우 짜임새 있게 계획됐다.


# 근정문


#근정전


# 조선 왕실의 상징인 ‘봉황’


궁궐의 주요 문과 주요 전각은 남북을 축으로 하는 일직선 상에 놓여있다. 정문인 광화문, 정전인 근정전, 편전인 사정전, 침전인 강년전은 모두 한 줄로 배치했다. 엄격한 격식 보단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던 창덕궁, 창경궁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주요 전각에 딸린 부속 건물들은 각 영역 안에서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배치됐다. 둘레엔 네모반듯하게 궁성을 쌓았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문을 냈다.
경복궁 건축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엄중한 질서와 절제의 위엄은 예의와 도덕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한 조선 왕조의 기본 정신에서 비롯됐다. 궁궐의 전각들이 각기 서열과 쓰임새에 걸맞은 규모와 모양새로 지어졌지만 호사스럽거나 위압적이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다.
경복궁(景福宮)은 ‘만년토록 빛나는 큰 복을 지닌 궁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엔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며, 대대손손 태평함을 이어가겠다는 조선 왕조의 강한 소망과 이상이 담겨 있다.



# 새단장 이후 광화문과 경복궁을 찾는 방문객이 대폭 늘었다.
위의 아래 사진은 기념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

‘세종’ 때 가장 활기

경복궁이 가장 활기찼던 시절은 세종 때다. 정조가 창덕궁의 규장각에서 조선 부흥의 꿈을 꿨다면 세종은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경복궁에서 일궜다. 세종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각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며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냈고 여러 가지 기술과 제도를 고쳐나갔다.


# 경복궁은 세종 대왕 시절이 전성기였다.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발명해냈고 측우기와 해시계 등 과학 기술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경복궁의 역사는 조선의 그것처럼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392년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1394년(태조 3) 한양 천도를 결정하고 궁궐 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395년엔 390여 칸에 달하는 궁궐의 중심전각이 완공됐고 1398년(태조 7) 궁궐의 담장이 완공됐다.


1400년대는 ‘법궁’으로서의 체계를 확립한 단계다. 1412년(태종 12) 경희궁이 중건됐고 1427년(세종 9)과 1438년(세종 20)엔 동궁과 흠경각, 선원전이 건립됐다. 하지만 위엄을 자랑하던 경복궁은 1500년대에 수난의 시기를 맞는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며 과거의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게 됐다.

일제의 ‘조선총독부’

이후 경복궁은 오랫동안 빈터로 남게 됐고 조선 통치의 중심은 창덕궁으로 이동됐다.
황량했던 터가 하나 둘 제 모습을 채운 것은 273년이 지난 뒤였다. 고종은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에 들어가 1867년까지 330여동 7700여칸의 전각을 지었다. 1873년(고종 10)엔 대원군의 품을 벗어나고자 건청궁을 지었다.
하지만 ‘재기’의 시간도 오래 가지 않았다. 1895년(고종 32)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고, 아관파천 같은 고통을 겪었던 고종은 덕수궁으로 몸을 옮겼다. 주인을 잃은 궁궐은 조선총독부가 완공되고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로 전각 다수가 철거되며 또 다시 심한 ‘홍역’을 치러야 했다. 1927년 이건된 광화문은 1951년 한국전쟁으로 완전 소실됐다.
1968년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광화문이 복원됐지만 이미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1995년 강녕전, 교태전, 흠경각, 함원전 등이 복원됐으며 1997년 구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됐다. 동궁이 복원된 것은 1999년이었으며 이후 태원전, 건청궁이 차례로 복원됐고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 광화문이 새로운 얼굴을 선보였다.

상상 속 동물 ‘해태’

새롭게 복원된 광화문은 화강암으로 육중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이층의 문루를 얹었다. 기단에 있는 3개의 아치형 출입문이 경복궁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운데 문은 과거 임금만 드나들 수 있었던 문이다.
돌로 만든 기단 위엔 흙을 구워 만든 ‘전돌’로 나지막한 담을 둘렀는데 팔쾌 문양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는 조선 궁궐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일제는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변질시킨 것처럼 광화문의 위치도 멋대로 다른 곳에 옮겼다. 경복궁의 기본 축을 망가뜨림으로써 민족 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였다. 1968년 복원된 광화문도 철큰 콘크리트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중심측과 5.6도 틀어지고 후면으로 14.5m 물러나는 등 원형과는 거리가 있었다. 새롭게 공개된 광화문은 이 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로 제작됐던 광화문 한글 현판도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바로 잡았다. 새 현판은 고종 때 공사책임자였던 훈령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의 글씨다.


#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해치)는 서울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경복궁 전면 양쪽엔 해태 한 쌍이 지키고 있다.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해태상은 서울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 화재를 막는 기운이 있었다고 한다. ‘해태’는 상상의 동물로 ‘해치’라고도 하는데 사람들의 잘잘못을 가려 잘못이 있는 사람은 머리에 난 뿔로 벌을 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광화문 바로 앞 좌우에 있지만 원래는 광화문 앞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궁궐에 들어오는 사람은 해태상 앞에서부턴 가마나 말에서 내려 걸어서 경복궁에 들어갔다고 한다.
광화문 복원 이후 경복궁을 찾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다. 광화문 광장부터 이어지는 코스는 서울의 인기 명소로 떠 올랐다. 경복궁 관계자는 “예전엔 그나마 주말만 붐볐는데 요즘엔 평일에도 5만명은 족히 되는 것 같다”며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 흥례문



#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


광화문을 지나 첫 번째 문인 홍례문 앞에선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매시간 정각에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데 볼만하다. 흥례문까지는 무료이며 매주 화요일 궁 관람이 쉰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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