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가지 일로 바빴던 왕들의 휴식처 ‘경회루’
만가지 일로 바빴던 왕들의 휴식처 ‘경회루’
  • 승인 2010.10.1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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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궁궐 나들이 3 경복궁 두번째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조선왕조의 제일 궁궐인 경복궁을 둘러봅니다.


# 조선 왕실의 큰 연회가 열렸던 ‘경회루’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정전인 근정전까지는 흥례문과 근정문을 지나야 한다. 모두 일직선상에 배치돼 있다. 그 규모와 거리에 있어서도 조선 궁궐 중 최고다. 창경궁은 정문에서 명정전까지 가는데 별도의 대문이 없다. 창덕궁은 인정문에 이르기까지 진선문과 인정문을 통과해야 하지만 자연 지형을 배려해 한축을 이루진 않고 있다.

현존 최대 목조 건물 ‘근정전’

근정전(국보 223호)은 왕이 문무백관에게 조회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며 즉위나 책봉, 혼례 같은 나라의 주요한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왕과 나라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중층의 전각은 높고 넓은 2층의 월대 위에 당당히 올라서 있다. 근정적 주변을 둘러싼 행각의 기둥들은 마치 왕을 호위하는 듯 줄지어 배치됐다. 1395년(태조 4)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현재 건물은 조선 말기인 1867년(고종 4) 11월에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것이다. 다포양식의 건물로 현존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의 팔작지붕으로 직사각형 형태를 띄고 있으며 어좌 뒤엔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오악일월도가 있다. 단청과 금색쌍룡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해 조선 말기 건축의 정수로 손꼽힌다.


# 근정전 내부. ‘어좌’와 ‘일월오악도’


# 근정전 천장에 그려진 ‘금색쌍룡’.


마당 한 가운데엔 왕이 다니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신하들이 걷는 신도가 있으며 신하들이 지위에 맞추어 자리하도록 품계석을 세웠다. 왕을 중심으로 신분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일면을 보여준다.

동쪽은 ‘봄’, 서쪽은 ‘가을’

사정전은 왕이 평소 머무르며 나랏일을 돌보았던 곳으로 ‘깊이 생각해 나랏일에 임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인 사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사정문을 통과해야 한다. 조선의 왕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국정에 임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왕의 업무공간이었던 사정전 내부

세종이 밤늦도록 학문을 연구하고 집현전 학자들과 의견을 나눴던 곳도 사정전이었다. 집현전은 세종이 궁궐 안에 설치한 인재 양성과 학문 연구의 기관이었다.
사정전은 궁궐 건물로는 드물게 마루만 있고 온돌 장치가 없다. 때문에 추운 겨울에는 사용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동절기를 위한 부속건물이 사정전 양쪽으로 들어섰는데 바로 만춘전과 천추전이다. 봄을 상징하는 ‘춘(春)’은 대부분 동쪽에, 가을을 상징하는 ‘추(秋)’는 서쪽에 자리했다. 경복궁의 동문이 ‘건춘문’이고 서문이 ‘영추문’인 것도 이 때문이다.



# 온돌이 없던 사정전을 보조하기 위해 양쪽으로 천추전과 만춘전을 세웠다.

집현전 이외에도 왕의 집무 공간 가까운 곳엔 업무의 신속한 처리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설치한 관청들이 있었다. 궐 안에 들어왔다 해 ‘궐내각사’라 불린 여러 관청 전각들 가운데 현재는 수정전이 남아 있다.


# 사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사정문을 지나야 한다.

집현전, 갑오개혁의 산실

사정전을 둘러보고 왼쪽 작은 문으로 나서면 넓은 공간과 경회루(국보 제224호)가 보인다.
아래쪽에 보이는 건물이 수정전이다. 수정전이 들어서기 전엔 세종 때 한글 창제의 산실이 됐던 집현전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세종은 자신이 가장 아꼈던 집현전을 경회루와 가까운 곳에 뒀다. 조선 후기의 부흥을 꿈꿨던 정조도 규장각을 후원 중심에 배치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 후세에 ‘성군’으로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 집현전 자리에 세워진 수정전은 갑오개혁의 중심이었다.

수정전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건물로 역시 임진왜란 대 소실된 것을 고종이 재건했다. 재건 당시만 해도 주변에 약 200칸의 행각과 전각이 있었지만 1910년 이후 일본인에 의해 모두 헐렸다.
고종도 수정전은 주요 업무 공간으로 활용했는데 1894년(고종 31)에 단행한 갑오개혁의 중추적 역할을 한 군국기무처와 내각 청사가 설치된 곳이다.

‘경사스러운 연회 장소’

사정전 왼쪽, 수정전 위쪽으론 경복궁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경회루(국보 제224호)가 자리하고 있다.
‘만 가지 일을 처리하는 여가에 책을 읽는다’고 한 정조의 말처럼 ‘만가지 일’로 바쁜 왕과 왕실 가족들에겐 편안히 쉴 수 있는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이 필요했다. 누각의 이름은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의미다.


# 정면에서 본 경회루


#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세운 정자

경회루는 연못 안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은 큰 누각으로, 주역 사상에 바탕을 둔 우주의 원리를 건축에 담고 있다. 왕이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열 때 이용했다. 가뭄이 심할 땐 ‘기우제’도 열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땐 작은 규모였지만 1412년(태종 12)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했다. 이 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있는 동산(아미산)을 만들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덜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 지붕이다. 태종 때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했으나 다시 지으면서 간결하게 바뀌었다.
기록에 따르면 경회루는 주역의 원리에 의해 지어졌다. 외부 24개의 사각기둥은 네모난 땅과 24절기, 24방위를 나타낸다.
내부 24개의 원기둥은 둥근 하늘을 나타내 ‘하늘은 둥굴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사상을 반영했다. 2층 중앙의 3칸 구조는 천, 지, 인을 상징하며 이를 이루는 8개의 기둥은 8괘를 의미한다. 내진을 구성하는 12칸은 12달을 의미하며, 내진을 둘러싼 16개의 기둥 사이엔 4짝의 문이 설치돼 64쾌를 상징한다.

‘단종이 옥새를 내어준 곳’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론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목조 건물의 최고봉인 경회루의 그림자가 연못 속에 드리운 모습은 국내에서도 손꼽힌다. 최근 경회루 내부 관람이 개방되면서 이를 예약하기 위한 발걸음이 줄잇고 있다. 연못에선 뱃놀이도 즐겼다고 하며, 한쪽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낚시를 위해 세웠다는 작은 정자가 있다.
활쏘기를 좋아한 세조는 경회루에서 연못 너머에 과녁을 설치한 후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연못에 하나도 빠지지 않을 만큼 잘 쏘았다고 한다. 경회루는 어린 단종이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눈물로 옥새를 내어 준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경회루’를 사적으로 이용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왕실 내 왕비나 왕자들의 생일이나 회갑 잔치는 모두 다른 곳에서 열렸다. 이처럼 근정전과 사정전, 경회루는 조선 제일 궁궐의 중심부로서 왕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와 목조 건물의 아름다움 또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기에 더 없이 좋은 산책 코스다.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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