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막내아우의 딸


# 149일째

작년 11월에 결혼한 막내아우가 백일이 막 지난 딸을 데리고 왔다. 이른바 속도위반을 했다는 얘기는 진즉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위반의 정도가 매우 깊다는 것은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알았다. 예식장에서 나온 지 6개월도 안 됐는데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갔다는 말에 엄숙한 목소리로 “응 그러냐, 고생하신다고 전해드려라”하고 말기는 했지만 전화를 끊은 뒤부터 푸슬푸슬 흘러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을 이유가 없어서 며칠 동안이나 계속 밥 먹다가도 웃고 자다가도 웃는 이상증세로 비틀거려야 했다.
어쨌든 한 집안의 장남에 장손까지 된 입장인 나로서는 시쳇말로 한시름 놓았다는 기분이었다. 막내 녀석이 연애 비슷한 교제나 찔끔찔끔 하고 만다는 얘기는 다른 아우들을 통해서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쩐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푼수로 결혼에 실패한 큰형 때문에 막내가 혼자 살기로 작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딱히 우울할 이유도 없이 심난해지곤 하던 거였다.


# 백일 다음 날에

사자가 없는 산에서는 토끼가 왕 노릇을 한다고도 하지만,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마저 치매라는 이름의 기억장애를 겪고 있는 집안에서 홀아비 장남의 위치란 감옥에 갇힌 왕이라고나 할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지만 여기저기 둘러보며 고민해야 할 일은 정신없이 많은 자리였다. 게다가 막내 녀석이  가정형편을 이유로 대학 2학년 때 학교를 포기하고 직업군인을 하는 터이고 보니 그런 아우를 대하는 큰형의 마음이란 뭐랄까, 딱히 지은 죄도 없이 늘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말 한 마디도 크게 하기 어려웠다.
그런 안타까운 녀석이 마당에 국화가 한창 피어나는 10월의 어느 하루 여자를 데리고 왔다. 으레 여자친구 누구라고 소개를 하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먼 미래가 아닌, 첫눈이 내리기 전에 식을 마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날짜가 잡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결혼식을 끝내고 근무지인 경기도의 부대 인근에 방을 구해 살림을 시작했다.


# 이때 이미 딸이 예정되어 있었다나


# 이때 이미 딸을 예약하고 있었다나

그리고 한 달이나 지났을까. 너무나 정신없이 치러낸 결혼식에 대한 감격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무슨 진급이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육군 중사에서 상사로 한 계급 올랐다는 거였다. 이게 뭐냐. 국가에서 주는 결혼선물인 것이냐? 어쨌든 좋다, 좋아, 계속 그렇게 좋은 일만 생기면 얼마나 좋겠느냐, 어쩌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날들이 훌쩍훌쩍 지나서 어느새 3개월이 넘었는데 이번에는 뱃속의 아이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딸이라는 둥, 예쁜 태명 하나를 큰아버지가 지어 달라는 둥, 본명도 미리서 지어놓으라는 둥, 자발도 그런 자발이 없겠다 싶은 자발을 무던히도 떨던 녀석들이 드디어 아이를 낳았다. 예상대로 딸이었다. 내 딴에는 큰아버지랍시고 이틀 동안이나 사주를 보고 또 보고 글자를 찾고 또 찾아서 최고다 싶은 글자 두 개를 조합해서 보냈는데 녀석들은 아니란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발음이 일단 남자 이름 같아서 싫단다. 그러니 다시 지어달란다.
나도 내 나름의 자존심이 있는데 다시 짓는 거는 싫다, 그 이상의 좋은 이름은 내가 찾을 수 없다. 그러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하고 말았다. 그것은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는 뭐랄까, 이십 년도 넘는 나이 차이에서 오는 감각의 차이를 즉각적으로 깨끗이 인정한 것일 뿐이었다. 막내아우 부부가 의미보다는 감각을 중시한다면 그것을 내가 인정하고 존중해야지 어쩔 것인가 말이다.


# 사촌들의 품에 안겨서

그렇게 해서 신생아의 이름이 새로 지어졌는가 어쨌는가, 알 수도 없는 채로 백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경기도까지 내가 여행을 하기도 어려웠고, 군인 직업을 가진 아우 자신이 병영을 멀리 떠나기도 어려운 까닭에 다음 주면 어떨까, 다음 달이면 어떨까, 하는 식으로 상면의 기회가 자꾸 늦춰진 거였다.
그리고 백일이 되던 날, 그 다음 날에야 겨우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백일에는 백설기떡을 백 개 해서 옆집에 돌려야 한다고, 친정어머니가 그러셨다면서 눈처럼 하얀 떡을 몇 꾸러미나 내놓는 제수씨에게는 건성으로 대충 인사나 건네고 아이에게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로서는 그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이었다.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냐 했더니 솔이란다. 외자다. 역시 내가 지어준 이름은 아니다. 어쨌든 솔이라 해서 “솔이, 김솔?”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질문을 했는데 막내아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뜻밖이었다.
“아니에요, 김솔 아니고 전솔이에요.”
내가 성이 김가였다. 막내아우도 나와 같은 김가였다. 제수씨의 성이 전씨이기는 했다. 우리 아버지가 김씨였고, 할아버지도 김씨였고, 그 윗대의 할아버지들도 족보를 보면 계속 김씨 성만 나오는데 막내아우가 자기의 딸을 김가 성이 아닌 자기 아내의 성인 전씨를 붙였다는 얘기였다.
이게 뭔 잠결에 남의 다리 긁자는 얘기도 아니고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한참을 멍 때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그렇게 멍청해 있는 동안 옆에서 제수씨가 “혼인 신고 때 오빠가 호주를 제 앞으로 해 버려서는 그만...”하고 급하게 아직 붙지도 않은 불을 끄고 나서는데 그제야 나는 사태(?)의 전말을 알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흐흠, 그래. 막내 이놈이 진보를 했다 이거지? 직업군인답게 보수인 줄로만 알았는데 진보에도 겁나 관심이 많았다 이거지? 등등 그런 생각이 빛의 속도로 지나가면서 약간 자존심마저 상하려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자칭 진보라는 사람을 많이도 만나고 있지만, 두세 번 보고 나면 진보라는 게 대체 뭔가 하는 의구심으로 괴로워하는 게 다반사가 되어버린 요즘이고 보면, 입으로 굳이 진보 따위를 표방하지 않으면서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는 아우의 태도가 엄청 커다랗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 생각과 마음이 그런 줄도 모르고 제수씨는 계속 불만 끄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이제 곧 다시 바꾸려고 하는데, 오빠가 괜히….”
“바꾸기는 뭘 바꿔요. 성이 중요한 거는 아니잖아요. 사람이 중요한 거지.”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나는 그렇게 제법 대담한 척, 내면세계가 엄청 넓어서 무엇이든 다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척하고는 있었지만 진짜 내면은 결코 간단하지가 아니었다. 무수히도 많은 주마등이 켜지고 있었다고 할까. 가상의 다큐멘터리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상영되고 있었다고 할까. 하여튼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그 뒤에 나오는 그 어떤 이야기에도 관심을 집중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혹시 이 녀석이 자신의 군인 직업을 이런 식으로 마땅찮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언제 전쟁이 터져서 자신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아니 설령 전쟁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사건이며 사고며 사태며 자살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군인들의 생명이 사라지는 빈도수가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는 상황이고 보면 드러내놓지 못할 절망감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니까 막내는 지금 그런 절망감 때문에 자기 딸의 성을 자신의 것이 아닌 아내의 것으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 추론에 근거라도 제시하듯 막내는 문득 얼마 전에 다녀왔다는 조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신형 국산 장갑차가 저수지에서 훈련 도중 수면 위로 부상을 못하고 그 안에 있던 부사관이 사망한 뉴스는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내가 거기 조문을 다녀왔다는 거였다. 그 사건을 얘기하며 아우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사건은 그나마 언론의 조명이라도 받았지만, 이 땅에서 군인들의 생명은 그야말로 초개와 같이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자신의 목숨도 그와 같이 안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이야기를 막내는 그런 식으로 내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날은 대충 그런 정도에서 헤어지고 말았지만, 헤어진 뒤의 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내가 명색이 장남에 장손 타이틀까지 달고 있는데 머잖아 족보 증보 작업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편찬위원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동김씨 족보에 전씨 성 가진 이름을 반드시 올려야 한다고 우격다짐을 하다가 패배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전씨 족보에 올리라고 할 것인가.


# 자란만큼 더 커진 공갈꼭지

그나저나 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성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신앙처럼 떠받들게 되었을까. 성씨의 기원이야말로 어쩌면 소유욕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의 기원은 아닐까? 인류학자들의 저작물을 보면 가족제도는 정치권력의 필요에 의해 적극 권장되고 강제된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시기는 아마 정착생활이 가능한 농경 시대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성씨의 도입이 곧 자본주의의 시작이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가축을 네 것 내 것으로 분류했듯이, 사람 또한 네 자식 내 자식으로 구분해서 차등 대우를 하는 것, 여기에 근친상간으로 인한 열등인자의 출현 등 우생학적인 경험이 가세하면서 성씨 제도는 아마 숙명처럼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공부해야 할 일이 많은 시기에 접어든 것 같다, 내가. 그러고 보면 이런 식의 공부란 역시 젊은 시절에 할 일은 아니고, 중년을 넘어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젊어서 이런 관념적인 것들에 천착하다 보면 늙어서도 그것을 그대로 간직하고자 하게 되고, 그것은 곧 ‘수구꼴통’으로 직결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결론은, 젊어서는 실컷 노는 경험을 쌓는 게 좋다는, 그런 말이 가능한 것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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