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각시거미의 매력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뭔가 얼굴을 쓰윽, 만진다. 쓰다듬는다. 쓰다듬는가 싶더니 그대로 차악, 달라붙는다. 뭐냐 이거, 누구냐. 아아 그래, 거미다. 아니 거미줄이다. 거미가 나를 사랑해서 내 얼굴을 만지고자 했는가? 내 얼굴을 만지고자 그렇게 문 앞에 주렴을 치듯이 줄을 쳐놓고 나를 기다렸던 것인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닌데도 매번 “오, 이런” 소리가 입에서 절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내 숙연해진다. 나는 지금 거미에게 잡힌 것인가? 아니면 거미가 나로 인해 집도 절도 다 망가지는 횡액을 당한 것인가.



거미에 비하자면 내 몸이 적어도 삼천 배는 무게가 더 나갈 것이요, 부피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니 내가 거미에게 잡혔다는 말은 특별한 경우의 상징으로나 가능할 뿐 현실적으로는 가당찮은 과장이 된다. 나는 결국 거미의 소중한 재산을(?) 망쳐놓은 악당일 뿐이다. 사람 세상의 이야기로 치자면 광대무변의 바다에 멸치나 작은 크릴새우 같은 것들을 잡으려고 그물을 쳐놓았는데 거대한 고래가 들어와서 그물을 죄다 찢어버린 형국이다.


# 청년 시절의 각시거미

어쨌든 둘 다 고의성은 없었다. 거미는 나를 잡을 목적으로 내 방 문 앞에 그물을 친 것이 아니었다. 나를 불쾌하게 할 목적으로 그런 작업을 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 또한 거미의 재산을 망칠 목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 게 아니다. 서두가 쓸데없이 길어지기 전에 본론부터 말하자면 거미와 나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거미는 거미의 세상을 살고, 나는 나의 세상을 사는데 우리는 왜 그리도 자주 부딪쳐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어느 하루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 이 대단한 포스

그날 이후 나는 거미줄을 함부로 걷어버리지 못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거미줄만 보면 빗자루나 대나무 이파리를 치켜들고 다니면서 걷어내곤 했지만 이제는 거미줄을 보면 피해서 가줄 수 있을 정도로 거미의 세계를 존중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방 안에 쳐놓은 거미줄은 아주 후미진 곳이 아닌 한 보이는 대로 없애고 있기는 하지만, 마당이나 텃밭에 있는 거미줄은 가능한 한 원형 그대로 존속될 수 있도록 신경을 쓰는 한편 각시거미(혹은 무당거미 또는 호랑거미) 같은 색깔이 화려한 종류를 만날 때면 “각시야 나 왔다” 어쩌고 그렇게 다정하게 속삭이는 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 각시거미의 음식물 찌꺼기들


# 왕거미의 식사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거미를 무서워한다. 무서워서 아직 한 번도 손으로 만져보지는 못했다. 언제인가는 결국 만지게 되겠지만, 만지고 난 뒤에 내가 그만 거미의 세계로 푹 빠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미리 들 정도로 거미의 삶은 매혹적이다. 그 중에서도 각시거미류의 색깔이 화려한 녀석들이 보여주는 삶의 자세는 단연 압권이다.
각시거미나 무당거미 그리고 호랑거미들의 미세한 차이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곤충 전문가라면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그래서 이러이러한 분류가 가능하다 하는 식으로 똑 부러지게 설명을 하겠지만,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도 하거니와 또한 그런 식으로 분류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기에 색깔이 화려한 거미들은 싸잡아서 그냥 각시거미라 부르고 있었다. 어쨌든 이 녀석들은 그 생김새라든가 살아가는 모습 등등 모든 면에서 여타의 거미들과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 각시거미의 성채 혹은 미로

다른 거미들은 그물을 쳐놓고 숨어서 먹이가 걸리기를 기다리지만 각시거미는 절대로 숨지 않는다. 색깔도 다른 거미들은 식별이 잘 안 될 정도의 잿빛이거나 흙빛을 띠고 있지만 각시거미는 어차피 태어난 세상 화려하게 살겠다는 듯이 알록달록 현란스럽고 다리도 엄청 길어서 피아노라도 칠 것만 같다. 집을 지어도 다른 거미들은 한 번 지어놓은 것을 매일 한 차례씩 보수하고 자신의 성장에 따라 약간씩 확장하는 정도에 그치지지만 각시거미는 집을 고치는 법이 없다. 


# 하늘을 거꾸로 걷는 듯이

왕거미의 집수리 장면을 두 시간도 넘게 지켜본 적이 있는데 그 장면은 숨이 막히도록 섬세하고 정교해서 마치 세탁소 아저씨의 짜깁기 기술을 보는 것 같았다. 작은 새나 왕메뚜기 같은 큰 동물이 뚫고 지나간 자리를 왕거미는 매일 한 차례씩 해가 질 무렵이면 수리하고 있었다. 마치 하늘을 걷는 듯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껑충 뛰어서 줄 하나를 쳐놓고 그 줄 위를 줄타기 선수처럼 걸어서 원래의 위치로 갔다가 다시 껑충 뛰어서 또 하나의 줄을 치는 방식으로 그렇게 날줄을 쳐놓은 다음 촘촘히 씨줄을 엮어 집수리를 끝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왕거미는 요새 인간 세상에서 유행하는 말로 치자면 매우 실용적인 삶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셈이었다.


# 날렵한 너무나도 날렵한

그러나 각시거미는 전혀 다르다. 실용은 무슨 얼어죽을 실용이냐는 듯이 각시거미는 집수리 따위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그물이 망가지면 망가진 그물에 잇대어서 보조그물을 친다. 이 보조그물이 매일 하나씩 보태져서 두세 달 후에는 거대한 성채가 되어버린다. 왕거미가 쳐놓은 그물의 공간 점유율이 두께 1밀리미터에 전후좌우 각 40센티미터 정도라면 각시거미의 공간 점유율은 전후좌우 사방으로 2미터가 훌쩍 넘어버릴 정도로 거대하다. 이 거대한 성채 안에서 각시거미는 마치 춤이라도 추듯이 느긋하게 걸어 다니며 먹이가 걸리면 먹고 안 걸리면 계속 걷는다.   


# 성큼성큼 땅 위를 걷듯이

먹이가 걸렸을 때 달려가서 제압하는 거동 또한 우아하기 그지없다. 왕거미 같은 애들은 재빠르게 쫓아가서 온 몸으로 뒹굴뒹굴 정신없이 후다닥 상대를 제압한 뒤에 한숨을 돌리고, 그리고 본격적인 식사에 들어가지만 각시거미는 다르다. 사냥감이 걸렸는데도 오, 너 걸렸냐, 고 녀석 참 귀엽네, 하는 듯이 멀리서 한참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우아하게 춤을 추듯이 긴 다리를 성큼성큼하는 것도 아니고 하늘거리며 다가가서 천천히 제압해 들어간다.
식사를 끝낸 뒤의 처리 방식 또한 각시거미와 여타의 거미들은 완전히 다르다. 여타의 거미들은 먹을 것을 다 취한 다음 찌꺼기를 줄로 뚜르르 말아서 땅으로 떨어트려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하지만 각시거미는 웬걸, 청소는 무슨 청소냐는 듯이 찌꺼기들 사이를 유유히 돌아다닌다.
왕거미가 찌꺼기를 굳이 땅으로 떨어트리는 이유는 아마도 주변이 깨끗해야 다른 먹잇감들이 안심하고 지나가다 걸려든다는 철학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각시거미는 그런 철학을 취하지 않는다. 그런 철학은 음흉한 속임수일 뿐이라는 듯이 다 드러내놓고 심지어는 자신의 존재 사실마저도 보란 듯이 드러내놓고 이를테면 당당하게 사냥을 한다. 내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너희를 먹어야만 한다, 너희가 내 목숨 보존을 위해 희생할지 말지는 너희가 선택하라 하는 뭐 그런 식이다.


# 먹잘것 없는 나비가 걸렸다

거미들에게 가장 골칫거리는 아마도 나비나 하루살이 같은 ‘먹잘 것 없는’ 것들일 게다. 나비는 그 커다란 날개 때문에 제법 큰 것이 걸렸구나 싶기도 하지만 그것을 제압하느라 쓴 에너지에 비하면 먹을 것이 너무나도 초라하다. 하루살이는 먹을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그물에 촘촘히 달라붙어 다른 날것들에게 여기 그물 있다 조심하라는 신호 구실을 한다.
때문에 왕거미는 하루살이 떼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그물을 죄다 철거하고 다시 짓는 수고를 고통스럽게 해야만 한다. 호랑나비 같은 날개 큰 녀석들이 걸렸을 경우에도 마찬가지, 먹을 것 없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각시거미는? 요새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하자면 ‘내비둬 버려’다. 내버려 두면 자연 속에서 자연 건조가 되어 며칠 뒤에는 한 점의 티끌로 사라져 간다는 것을 각시거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거미들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을 들자면 아마도 꿀벌일 것이다. 꿀벌은 눈이 있으면서도 정작 봐야 할 것은 못 보는 특이한 동물이다. 가을쯤의 성숙한 각시거미 한 마리의 그물에 걸려드는 꿀벌은 하루에만도 거의 십여 마리에 달한다. 그 많은 꿀벌들을 각시거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빨아먹고 나머지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리하여 각시거미의 거대한 성채 곳곳에 꿀벌의 사체가 무슨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게 된다.
그렇다고 사체들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 건조되고 자연 분해되어 스스로 한 점의 티끌로 사라져 간다. 그러니까 각시거미의 철학은 뭐라고나 할까,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기다림이라고나 할까. 그런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결코 자발스럽게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삶을 음미하는, 실용주의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나중에 결과를 보면 실용적이 되어 있는 그런 어떤 것.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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