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추 농촌의 어느 하루


# 시골 장날의 버스 안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충치 먹은 이빨이 너무 아파서 읍내 치과를 가야 했다. 읍내까지 약 25분 거리다. 요금은 2200원. 택시를 탄다면 그 열 배인 2만2000원을 지불해야 한다. 대도시에서라면 이만한 거리에 이만한 요금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이것이 상식이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더니 바로 장날이었다. 학생들 등하교 시간이 아닌 한 평소에는 손님 한두 명을 태우고 쓸쓸하게 고독하게 그리고 조금은 우울한 모습으로 달리던 버스가 모처럼 신이 났다. 여기서 한 명, 저기서 두 명, 읍내까지 가는 동안 정거장 다섯 곳에서 일곱 명이나 탔다.
“아따 자네 으디 가는가?” “오매 이것이 누구여?” “누구긴 누구여, 나제.” “오살헌다.”
아주머니 두 분이 서로 상대의 가슴께를 툭툭 쳐대며 웃음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차에 탈 때 들고 있던 보따리는 바닥에서 잠시 버림받은 채 뒤로 밀리고 앞으로 밀리고 버스의 진행방향에 따라 반대쪽으로 춤을 추듯이 밀리다가 한참 뒤에야 주인의 관심을 받고 그 품안으로 들어간다.
초등학교나 혹은 여중학교 동창쯤 되는 것 같다. 다들 결혼 이후 서울로 부산으로, 혹은 광주로 어디로 떠나버렸는데 두 사람은 남편을 잘 만났다고나 할까, 잘못 만났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리저리 해서 떠나지 않고 고향에 남아 운이 좋으면 가끔 한 번씩 이렇게 만나서 살풀이를 하듯이 수다를 떨곤 한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남편 이야기가 잠시 나오고 이어서 객지로 떠난 자식들 이야기, 그리고 풍문으로 들리는 옛 친구들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고 하다가 마침내 농사 이야기로 접어든다.



가만히 듣자 하니 아주머니 한 분은 참깨 다섯 되에 들깨를 또 그만치 보따리에 싸들고 시장을 보러 가는 것 같다. 다른 한 분 아주머니는 읍내 공무원에게 시집간 딸 산후 구완을 위해 이런저런 먹을거리들을 싸들고 집을 나섰다.
“그나저나 자네 올해 돈 벌었담서어?” “누가 뭔 돈을 벌어어?” “소문 다 났어, 이 여편네야. 돈부를 한 가마니나 했다든디 뭘.” “오오 그거, 아 글씨 복분자 죽은 디다가 설렁설렁 기냥 박았던 것인디 그렇게 나왔더랑게.” “옹골지겄네. 키로에 6000원씩이나 헌다딘디.”
1킬로에 6000원이면 80킬로 한 가마니라고 해봐야 돈 48만원이다. 일 년 동안 기다린 대가치고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하긴 복분자 죽은 자리에 그야말로 설렁설렁 ‘박아놓기’나 한 것이니 옹골지다고 말할 수도 있긴 하다. 게다가 금년에는 장마 뒤의 이상한 폭우 때문에 콩 종류가 거의 몰살을 하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이상기온으로 폐허가 된 복분자밭에서 돈부를 한 가마니나 했으니 소문이 날 만도 하고 자랑스러워 할 만도 하다.
아주머니들의 그런저런 대화를 등 뒤로 듣고 있던 운전기사도 흥이 났는지 갑자기 음악을 크게 튼다. 지나가는 관광버스 같은 데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던 까닭에 내 귀에도 익숙한 노래들이다. 아주머니들 옆 좌석의 아저씨 한 분이 어깨를 들썩거린다. 아주머니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뼉을 친다.
“어매 관광버스 타고 부산 가는 것 같네 잉?” “쫌만 더 키우시오.”
볼륨을 높이라는 아주머니의 부탁에 운전기사는 짐진을 피운다.
“뭐라고요? 재수없이 시끄런 게 끄라고요?” “아니라우. 키우라고요.” “아따 그 아짐씨 참말로 뭣을 키우란 말이요.” “아 소리 좀 키우란게요.” “뭐라고요? 안 들린당게요.” “아따 참말로 누구네 서방인지 오살스럽게 말도 안 듣네 잉?”


# 버스터미털의 중간상인

버스는 어느새 읍내로 들어섰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다. 읍내까지 열두 개도 넘는 정거장을 버스는 다섯 곳에서만 잠시 정차를 했다. 승객이 없는 정거장은 정거장이 아닌 것이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중간상인 몇 사람이 몰려오더니 아주머니의 손에서 보따리를 낚아챈다. 마치 잘 아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다.
“아니 나 쩌그, 쩌그 머시냐 나 아는 사람한테 갈 것인디.” “아따 그러지 말고 나한테 줘. 누구는 뭔 금테 둘렀간디. 됫박 잘 쳐주고 금세도 남 주는 것보다는 10원이라도 더 주면 더 줬지 빼먹지는 않을 거니께 잉?”
아주머니의 참깨 다섯 되와 들깨 다섯 되는 그렇게 해서 금방 중간상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단 잡히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팔라거니 안 판다거니, 달라거니 안 준다거니, 실랑이에 실랑이가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심하면 옷이 찢어지기도 하고, 넘어져서 코피를 흘리기도 한다. 속내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완전히 싸우는 모습이지만, 아는 사람 눈에는 이것만큼 정다운 풍경도 없다.
그렇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추억의 풍경이다. 6,70년대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대개 이런 경험 한두 개씩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가을걷이를 끝낸 뒤의 어느 하루, 주섬주섬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자루에 담고 끈으로 묶고 해서 만든 장보따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장에 가는 엄마를 따라갔다가 처음에는 중간상인들의 집요함에 질겁을 하고, 나중에는 뭔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키득키득 웃어대다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일기장에 그날의 풍경을 또박또박 적어나가던 시절의 추억을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 건조중인 나락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알아갔다. 산다는 것의 치열함을, 상업의 원리를 누구에게 구체적으로 배우지 않았으면서도 알아갔다. 그런 식의 중간장사를 모질고 단호하게 한 사람들은 오늘에 이르러 대형 유통업체 사장이 되었거나 한 번에 수백 마지기씩 거래를 하는 밭뙈기 장수가 되었다. 모질지도 못하고 단호하지도 못해서 소비자들이 더 달라고 하면 더 주고 깎아달라 하면 손해를 보면서도 깎아주는 등으로 오늘이 어제 같은 장사를 해온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버스에서 내리는 농부들의 보따리를 귀신같이 발견하고 쫓아가서 “나한테 주시오 잉? 다른 데보다는 20원 더 쳐줄게∼”하고 외친다.
치과 진료를 끝내고 나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리어카에 커다란 소를 묶어서 달고 “이랴, 이랴!” 소리도 경쾌하게 들판을 가로지른다. 이런 이색적인 풍경을 어찌 놓치랴 싶어 버스에서 내렸다.
“아니 할아버지. 소는 이렇게 큰데 달구지가 이렇게 작아서야 원, 소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요.” “거 먼 소리를. 달구지가 얼마나 무거운데. 이렇게 리어카를 달아놓으면 가뿐하단 말이거든.”


# 콩대 가지러 가는 간이 달구지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과거의 달구지는 바퀴 두 개만으로도 100킬로가 훨씬 넘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지금 소의 노동을 완화시켜 줄 요량으로 과거의 무거운 달구지가 아닌 리어카를 장착하고 가뿐하게 “이랴, 이랴!” 소리를 내며 소와 자신의 공존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고기를 목적으로 길러지는 소 외에 다른 소를 보기가 힘든 요즘 세태에서 이런 풍경은 참으로 귀하지만, 할아버지 자신에게는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일상일 뿐이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할아버지에게는 할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독거노인인 셈이다. 아니다, 참. 가끔 움메, 움메 소리도 낭랑하게 노래를 불러주는 소가 옆에 있으니 독거노인은 아니다.
멀리서 고추 장사의 확성기 소리가 들린다. “고추 파세요, 고추. 고추 장사가 마을 앞에 와 있습니다. 고추 파세요, 고추. 이런 고추 저런 고추 모두 삽니다. 희나리 고추도 삽니다. 고추 파세요, 고추.”
희나리 고추는 탄저병으로 못 쓰게 된 고추를 말린 것이다. 성한 고추도 건조 과정에서 뭔가 조건이 안 맞으면 붉은 기운을 잃고 희게 변해 버린다. 이런 고추는 인체에 해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래서 지자체마다 희나리 고추 불태우기 사업을 벌이기도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간 장사들은 그것을 사 들인다. 그것을 누가 먹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과거에는 군대에 납품한다고 했다. 한때는 라면 스프에 들어간다고 했다. 지금은 외국에 수출한다고, 믿기 어려운 대답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중간 상인들은 그것을 열심히 수집해 간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있는 법, 나쁜 것을 수집해서 넘기는 중간 상인을 나쁘다고 볼 수 있을까?
어쨌든 농촌의 가을은 이렇게 겨울로 접어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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