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가을의 끝자락에서




지리산 넘어 멀어지는 가을

가는 가을이 아쉬워 지리산을 찾았다. 지리산에 가면 가을의 한 토막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웅장하다. 그 웅장한 위엄에 의해서라도 가을이 붙잡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머물러 있을 가을을 기대하며 산을 찾았다. 기대는 언제나 무너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 기대하는 가을은 그곳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지리산을 벗어나 있다. 아니 저 너머로 멀어지고 있다. 붙잡고 싶어 산을 찾았는데, 가을은 저만큼 멀어지고 있다. 손짓하면서 웃는 계절이 야속하기만 하다.



가는 가을이 아쉬워 서둘러 출발하였다. 하늘은 황사로 뒤덮여 있다. 시야를 방해하는 황사가 얄밉기만 하다. 봄도 아닌데 어쩌자고 황사가 횡행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짜증을 주체하기 힘들다. 애써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를 썼다. 지리산에 가면 환하게 반겨줄 가을을 생각하며 쉬지 않고 달렸다.

가을에 대한 애착이 너무 심했던 탓일까? 운봉을 지나 지리산 산내면으로 접어들어도 고운 빛깔의 가을 얼굴은 볼 수가 없다. 서리를 맞아 메말라버린 이파리들만이 반겨주고 있을 뿐. 뱀사골로 향하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광은 실망 그 자체다. 가을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가을은 이미 지리산 자락을 따라 멀어졌다. 뱀사골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아직 채 떠나지 못한 가을과 마주했다. 반갑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욕심이 더 부려졌다. 계곡을 따라 조금만 더 들어가면 온전한 가을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욕심을 버릴 수 없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고 하였던가? 정령치 깊은 계곡까지 들어갔어도 가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풍광은 가을의 모습이 아니다. 그 것은 겨울 얼굴이다. 지리산은 이미 겨울에 접어들고 있다. 애써 부정한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가을이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멀어져간 가을은 찾을 수 없다.

육모정까지 내려왔어도 마찬가지다. 허탈해진 마음을 주체하기 어렵다. 이 웅장한 지리산도 가는 가을을 잡을 수는 없나보다. 아니 산은 오는 가을을 막지도 않고 가는 가을을 잡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껴본다.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산이 아름다운 건 바로 그 점 때문이란 사실을 왜 알지 못하였을까? 가을이 오면 산은 곱게 물들여지고 가을이 가면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걸.



산에서 배운다. 산처럼 느긋하다면 우왕좌왕하며 바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삶이 고통스러운 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보면서 잡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속절없이 멀어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삶의 고통이 커지는 것은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잡을 수 있고, 쫓기지 않는다면 삶은 훨씬 더 즐거워질 수 있다.

지리산 너머 멀어지는 가을을 보며 깨닫는다. 시간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잡으려 하면 더 빨리 지나가고, 밀쳐내려 하면 더욱 더 가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제멋대로인 게 시간이다. 간절한 마음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새삼 깨닫는다. 맞아 저 산처럼 살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그저 담담히 관조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은 해결이 될 터. 오는 계절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가는 세월엔 담담하게 손짓을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오는 계절에 연연하지 않고 가는 세월에 매이지 않는 삶이야 말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게 바로 시간과 동행하는 삶이다. 쫓기는 생활도 아니요, 밀리는 삶도 아니다. 바로 산처럼 사는 것이다. 비우면 채워지고 낡으면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 계절이 가지 않고 머물기만 한다면 그것 또한 큰 문제 아닌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까? 비워져야 새로워질 수 있다. 그 것이 바로 마음의 향기다. 가을이 가지 않고 머물고 있다면 겨울은 올 수 없다. 새로운 것이 발붙일 수 없다. 새로움이 없는 생활은 생각만 하여도 지옥이다. 그럼에도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었으니, 어리석음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리산 너머로 멀어지고 있는 가을이 고마워진다. 산이 고마워진다.



산처럼 살고 싶다. 시간에 쫓기면서 살지 않고 싶다. 더불어서 삶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싶다. 욕망을 줄이면 행복해진다고 하였던가? 산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마음에 채워진 욕심을 완전히 털어버릴 수는 없지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줄일 수는 있다. 가을을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도 결국은 욕심일 뿐이다. 때가 되면 가을은 보내야 한다. 산처럼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야겠다. 가을도 아름답지만 가는 가을이 더 멋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살아가야겠다.

지리산 향 그윽한 맛

정령치를 돌아 육모정을 지나니, 눈에 들어오는 간판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리산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배가 고팠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산에서 멀어지는 가을을 붙잡고 싶은 마음에 배고픈 것도 잊었나보다. 모든 것이 속절없는 일이라고 체념을 하니, 그 때서야 배가 고픈 걸 깨닫는다.

겨울의 길목에 들어선 주막에는 손님들이 없다. 한가한 모습에 여유를 누릴 수 있어 좋다. 주인의 얼굴도 넉넉해 보인다. 여자 주인은 카운터에 앉아 있고, 남자가 모든 일을 다 하는 듯 보인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주변을 둘러본다. 방안에는 온통 낙서로 그득하다. 주막에 들른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써놓은 낙서들이다. 글씨가 조잡하여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보아줄 수는 있다.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물도 가져오고 주문한 음식도 만들어 내온다. 남자와 여자의 영역이 무너져 있다.



둘레밥? 이름이 기이하다. 비빔밥인데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향기만으로도 허기를 자극한다. 처음 듣는 이름만큼이나 매력적이다. 둘레밥이란 이름은 지리산 둘레길을 차용한 듯하다. 이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그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찬도 마음에 쏙 든다. 양이 많지 않아서 우선 좋다. 거기다가 깔끔한 맛이 입맛을 돋우어준다.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추장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비빔밥이다. 언뜻 보기에 고소한 냄새 말고는 시각적으로 그렇게 맛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한다. 그런데 나물을 넣고 비벼놓으니, 상황이 달라진다. 맛이 기가 막히다. 어디에서 오는 맛인지 신기할 정도다. 먹으면 먹을수록 당기는 맛이다. 씹으면 씹을수록 묘한 맛이 샘솟는다. 독특한 맛의 정체가 무엇일까? 한참을 생각한다. 이내 결론을 내린다. 바로 지리산의 향기요, 맛이 아닐까? 산의 향이 듬뿍 담겼으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둘레밥을 먹으면서 지리산의 향에 듬뿍 취한다.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기대하지도 않은 맛에 취할 수 있어서 좋다. 행운이다. 지리산의 또 다른 매력이고, 지리산을 찾는 또 다른 기쁨이다. 마음껏 즐긴다.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이곳을 찾을 것이라 마음먹는다. 지리산은 그래서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고 포근한 것이리라.



여행의 즐거움이다. 낯선 지방에서 낯선 음식을 대하면서 예상 밖의 맛에 감동하는 것은 여행의 참 맛이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가을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지리산을 찾았지만, 그것이 모두 다 부질없는 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허전한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지리산의 맛에 빠져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붉은 단풍이 마지막 가을을 장식하고 있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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