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궁궐 나들이 5 덕수궁 첫번째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호부턴 조선 5대 궁궐 중 아픈 역사가 가장 많은 덕수궁과 그 인근을 둘러봅니다.


# 조선 역사의 ‘아픔’이 깃든 덕수궁은 전통과 근대가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아픔으로 시작해 아픔으로 끝났다. 하지만 고통어린 기억들 속엔 불굴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하려는 조선 왕실과 민중들의 열정 또한 깃들어 있다.
서울 도심에 위치한 5대 궁궐 중 덕수궁은 가장 늦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근대화 시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시대상을 반영하듯 궁궐의 모양 또한 다른 궁에 비해 일정하지 않다.


# ‘덕수궁’에서 국권 회복을 시도했던 고종황제의 어진

고종 재위 당시 이미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열강들의 공사관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이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경복궁을 나온 고종은 창덕궁이 존재함에도 이 곳으로 ‘법궁’을 옮겼다. 이들을 이용해서나마 일본의 세를 막아야겠다는 의도였다.

“고통의 역사도 우리 것”

덕수궁 관계자는 “도심에 있는 작은 고궁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찾긴 하지만 단순히  소풍이나 산책코스로만 인식하는 게 안타깝다”며 “빛나는 역사도 우리의 것이지만 아픈 역사도 마찬 가지다. 오히려 그 속에서 더 큰 교훈을 찾을 수 있다”고 관심와 애정을 부탁했다.
다른 궁궐도 그렇지만 복잡한 근대화의 격랑을 겪었던 덕수궁이기에 사전 지식을 아는 게 더 도움이 된다. 한마디로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머물렀던 구 러시아공사관



# ‘을미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이 이뤄졌던 중명전.
바로 옆이 미국 대사관이다.


덕수궁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됐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가 마땅히 머물 궁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이미 쑥대밭이 돼 있었다. 현재 덕수궁 안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으로 인해 덕수궁의 연원을 오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실제 궁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세종대왕 동상은 위인들의 업적을 높이 기리고자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세워졌다고 한다.


# 고종이 기거했고 승하한 ‘함녕전’. ‘안녕’과 ‘평안’을 뜻하는
이름과 달리 ‘독살설’이 설득력을 얻을 만큼 고종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 등 귀족들의 주택이 모여있던 이 곳을 임시 궁궐로 정했는데 정릉동 행궁으로 불렸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새이름을 붙였는데 바로 경운궁이었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아관파찬으로 러시아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부터다. 경복궁에 머물던 고종은 명성왕후 시해사건 이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겼고 이후 경운궁에서 생활했다.

‘국권 회복’의 의지

조선의 국왕인 고종이 이처럼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던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개화 이후 물밀 듯 들어온 서구 열갈등의 이권 다툼이 치열했고 일본 역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동안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의 틈바구니속에서 우유부단하게만 비쳐졌던 고종이 ‘국권회복’의 의지를 표출했던 곳이 바로 덕수궁이었다. 고종은 이 곳에서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맞은편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하늘에 제사를 지낸 ‘환구단’

환구단은 현재 조선호텔 경내에 있는데 신위를 모신 3층 전각인 황궁우, 용무늬를 새긴 돌북, 무지개문이 셋인 석조 대문이 남아 있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려고 한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일본이 못마땅해했지만 덕수궁 주위 열강들의 동의를 구해 성사시킬 수 있었다는 게 관계자의 말이다.


# 환구단에서 바라본 덕수궁의 ‘대한문’

고종은 ‘황제’의 위상에 걸맞게 경운궁의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켰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궐의 3배 가까이에 이르렀다. 서울시청 앞 과장은 절반 가까이가 덕수궁 담장 안에 들어 있었고, 북서쪽으론 경희궁과 거의 맞닿은 곳까지 궁궐 영역이었다. 지금은 바깥으로 밀려나 별도 관람이 필요한 중명전 역시 궁 영역에 속했다. 하지만 중간에 위치한 열강들의 관저들은 어떻게 손 볼 방법이 없어 기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장수를 비는 뜻 ‘덕수’

이런 한계와 일본의 책동으로 인해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끝내 좌절됐다. 일제는 헤이그 밀사 파견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했고 그 뒤를 순종이 이어받았다. 순종은 즉위 이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홀로 남은 고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난 1919년까지 이 곳에 머물렀다.


# 주위에 대사관 공관이 많아 경찰들의 경계가 상시적으로 이뤄진다.
사진은 덕수궁 뒤쪽 돌담길.


순종은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을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렸고 이후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됐다.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됐다.
이처럼 근대화 과정에서 중심이 됐던 덕수궁이었기에 인근 정동 일대는 그 어느 곳보다 근대 문물이 빠르게 전파됐다. 고종이 에디슨에게 직접 편지를 전할 정도로 서구 문물에 관심이 깊은 것도 한 몫 했다.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덕수궁에만 서양식 건물이 들어선 것도 이런 이유다. 정관헌은 전통 방식에 서양풍을 섞어 지었고, 석조전은 서양식으로만 지었다.

열강 속 ‘혼돈’의 장소

고종 시절 당시 서양의 외교관, 선교사, 무역상들은 한강 마포나루와 가까우면서도 도성 안쪽에 자리한 정동을 터전으로 삼았다. 서양인들은 문물을 전파하고 이득을 얻을 목적으로 공관들과 학교, 호텔, 종교시설 등을 이 곳 인근에 집중적으로 세워 나갔다. 그리고 고종은 이들을 이용해 일본을 제압할 목적으로 덕수궁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 정동제일교회. 이곳 일대는 기독교와 근대 교육의 중심지기도 했다.

때문에 덕수궁과 정동 일대는 지금도 당시의 자취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정동제일교회를 비롯 구세군과 성공회의 본거지도 근방에 있었다. 당시 신교육을 대표했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고종황제가 머물렀던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 등도 시대상을 보여준다.



덕수궁 화재로 중간에 거처를 옮겨야 했던 고종의 거처 중명전, 일제 때 숱한 독립운동가를 재판했던 경성재판소(광복 후 대법원청사로 사용하다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이용) 등도 지척이다.
이들이 모여있는 정동길은 덕수궁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서울의 가장 유명한 산책 명소로 꼽힌다.


-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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