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낙엽과 산국

낙엽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스르르르∼.” 낙엽 구르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한다. 감미로운 소리가 온 몸을 파고든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들이 춤을 춘다. 함께 춤을 추자 손짓한다. 일상의 근심은 미련 없이 털어버리고 바람에 몸을 맡기자 한다. 사소한 일들은 모두 다 놓아버리고 떠나가는 가을을 만끽하자 한다. 나 또한 낙엽이 된다. 바람에 몸을 맡기니, 나 또한 하나의 낙엽이 되어 방향을 잃고 날린다. 어딘들 어떠하겠는가? 어차피 인생은 그런 것 아닌가?




가을 끝자락의 내장사는 운치가 넘쳐난다. 마지막 여운을 즐기기 위해 찾은 사람들이 많다. 오색영롱한 단풍으로 곱게 치장한 내장사의 모습도 돋보이지만 낙엽이 날리는 모습도 그에 못지않다. 또 다른 매력이다.

벤치에 앉아 구르는 낙엽을 보았다. 부는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낙엽에 내 자신의 모습이 배어 있는 듯하다. 살아온 날들의 회한이 하나 둘 일어난다. 가슴 아픈 일들은 물론이고 가슴 벅차오르던 감동의 순간들도 겹쳐진다. 날아오르는 낙엽에 지난날들이 배어 있다.



마지막 발버둥치는 가을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마지막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애처롭다. 갑자기 과거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초라하다. 과거에 집착한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무심한 세월은 쉼 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쉬움으로 인해 연연한다. 안타깝다.

낙엽은 말한다.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한번 흘러간 세월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화려한 빛깔로 가을을 노래하던 단풍 이야기도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그 빛깔이 황홀했다 할지라고 이제는 지난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흘러가버린 지난날의 추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망각의 숲으로 사라졌다. 흘러간 세월은 과감하게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절정이었을 때의 우화정의 풍광은 으뜸이다. 그러나 가을이 지나가버린 뒤의 모습은 평범하다. 아니 오히려 쓸쓸하기까지 하다. 화려하였던 단풍의 색깔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우화정에서 과거의 집착 못지않게 허망한 것이 미래에 대한 집착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집착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얘기한다. 희망이 있기에 오늘을 열심히 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훨씬 더 많아진 시점에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 역시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 것 역시 집착일 뿐이다.



미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오늘에 충실할 수 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그 것을 보여준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날리는 모습은 오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메시지다.

미래의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집착하게 되면 오늘에 충실할 수 없다. 오늘을 성실하게 채워갈 수 없다면 미래 또한 얻을 수 없다.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오늘에 충실해야 비로소 내일을 알차게 맞이할 수 있다.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참 나를 찾지 않고서는 행복도 모래성일 뿐이고 삶을 아름답게 빛낼 수도 없다.



참 나를 찾기 위해선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나라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참 나는 빈껍데기일 뿐이다. 지수화풍이 인연에 따라 흩어졌다 모아진 결과가 나이다. 그 것이 흩어지게 되면 결국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참 나를 찾았다고 할 수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들이 그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온 몸으로 무아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무아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내장사엔 낙엽 구르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 소리가 감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인생을 음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되고, 살아갈 날을 되새겨보게 된다. 인생을 음미하면 할수록 더욱 더 절실해지는 것은 바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의 희망까지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참 나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참 나를 찾는다는 것은 무아의 경지에 이름을 말하고,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참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낙엽 구르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하는 내장사에서 하루를 보냈다.

노란 산국이 피어있다 

노란 산국이 피어 있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외진 곳에 피어 있다. 그 양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이 진하다. 어찌나 그윽한지 저절로 다가서게 한다. 그 것은 놀라운 힘이다. 마력이다. 꽃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실감할 수 있다. 향의 힘에 끌려 몰려든 벌과 나비 그리고 갖가지 곤충들이 분주하다. 향에 취해 꽃가루를 얻기 위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생명체는 모두 다 힘을 가지고 있다. 잡아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 힘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힘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이다. 그 힘에는 가식이 있을 수 없다. 끌리는 힘에 의해 매력을 느끼고 조화를 이루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그 힘의 영역에 들어서면 외면할 수 없다. 그 것은 본능이다.

산국의 향을 음미하다 보니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 힘을 만끽한다.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진한 향의 힘에 푹 젖어든다. 그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이란 느낌이다.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묘사되지 않는다고 하여 행복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고운 향이 온 몸에 배어드는 것만으로 만족스럽다.



향에 취하면서 초점을 생각한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느끼는 힘의 강도는 달라진다. 초점을 맞추게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힘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지만, 반대로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그 힘의 강도는 희미해진다.

산국의 공간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도, 좁혀질 수도 있다.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향의 공간은 현저하게 좁아진다. 반대로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면 무한대로 확대되어질 수 있다. 눈을 감고 산국의 향을 누리면서 그 것을 실감한다.



살아가는 것도 이와 같은 것 아니겠는가? 나에게도 다른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 단지 그 힘이 사람마다 모두 다를 뿐이다. 마음의 일치를 이루면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고, 초점이 맞추어지면 잡아끄는 힘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초점이 완벽하게 맞추어지게 된다면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 초점이란 바로 내면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영혼의 불꽃이 한 지점에서 스파크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일치를 하게 된다면 그 다음 상황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에너지는 무한대다. 본인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폭발력으로 터지게 된다. 그 힘은 그 무엇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하다. 사랑의 폭발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산국의 향이 그 것을 증명한다.



산국을 향유하면서 내 삶에서도 초점이 맞추어지기를 바래본다.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훨씬 더 많아진 시점이지만, 마지막 불꽃이 폭발하기를 기대해본다. 그런 희망마저 없다면 생활 자체가 무미건조해질 것이다. 지리산 한 자락에서 노랗게 피어난 산국을 보며 생활의 활력을 기대해본다.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해본다. 좋은 태도가 좋은 운을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순수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면 그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의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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