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했던 ‘중명전’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했던 ‘중명전’
  • 승인 2010.12.0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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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궁궐 나들이 5 덕수궁 두번째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조선 5대 궁궐 중 아픈 역사가 가장 많은 덕수궁과 그 인근을 둘러봅니다.


#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이 ‘중명전’에서 체결됐다.

덕수궁 탐방은 정동 산책길을 통해 경희궁에서 이어진다.
경희궁은 광해군 9년인 1617년부터 짓기 시작해 광해군 15년인 1623년에 완성된다. 반면 임진왜란(1592년) 이후 선조가 머물기 시작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며 사실상 ‘법궁’으로 사용됐던 덕수궁(경운궁)은 광해군이 창덕궁을 복원하고 옮겨가면서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간다.


# 중명전 현판

그럼 광해군은 왜 경운궁이 존재했음에도 새롭게 경희궁을 지었을까. 법궁이었던 창덕궁은 1607년(선조 40)에 복구가 시작돼 1610년(광해군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화재로 소실돼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됐다. 그 사이 머물만한 장소가 필요했고 대안이 바로 경희궁이었다.

광해군, 인조 즉위

광해군이 경운궁보다 경희궁을 선호했던 이유는 지리적 위치도 한 요인이지만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광해군은 재임 시절 선조의 두 번째 왕비였던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는데 그 곳이 바로 덕수궁이었고 이로 인해 궁의 지위도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선조에 이어 덕수궁에서 즉위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역시 역사적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해 이 곳에서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인조반정 이후 인목대비는 이 곳에서 광해군을 무릎 꿇리고 문책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상황은 인목대비측 입장에서 쓴 ‘계축일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머물던 구 러시아공사관

인조 이후 철종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은 경희궁에 머물렀는데 그 사이 덕수궁의 상당 부분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지는 등 ‘쇠락’의 길을 걸었다. 덕수궁이 다시 궁궐로서 부활했던 것은 한참 후인 고종이 머물면서부터다.
경희궁에서 큰길을 건너 정동길을 따라 덕수궁쪽으로 내려오다보면 예화예고 옆으로 길이 있다. 정동언덕 위 구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서울역사박물관으로도 산책길이 뚫렸다.


# 정동 언덕에 있던 원래의 모습. 이 곳에서 한양과 덕수궁
재건 현장을 내려다봤을 고종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구 러시아공사관은 사적 제253호로 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돼 탐과 지하 2층만이 남아있었으나 1973년에 복구됐다. 정문은 개선문 양식이며 한쪽에 탑을 세웠다.
현재 남아있는 전망탑은 회색 벽돌로 이뤄졌는데 탑 외부를 단장할 때 흰 회반죽 칠로 마감했다. 1층에 반원 아치의 출입구가 있으며 2층은 벽면으로 처리하고 전망대 구실을 한 3층은 사방에 한쌍씩 반원 아치 창문을 설치하고 위에 삼각형 장식(페디먼트)을 했다.

의문의 ‘지하통로’

이 곳은 유명한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머물던 장소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 뒤편 청운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가지 세자와 함께 이 곳에서 지냈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됐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됐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인 사바틴이다. 그는 중명전과 덕수궁의 주요 건물들, 그리고 독립문까지 유명했던 건물들을 도맡다시피 맡았다.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는데 덕수궁까지 연결돼 있다는 소문으로 주목을 받는 곳이다.



# 고종의 어진과 어새

안내문은 “이 곳 지하엔 밀실과 비밀통로가 마련돼 있는데 폭 45cm, 길이 20.3m다. 통로 중간 지점은 폭 50cm, 길이 5m로 확장돼 있는데 이는 통행인이 급히 왕래할 때에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덕수궁 관계자는 “그토록 좁은 통로로 왕이 이동하려고 했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구러시아공사관은 열강의 힘에 질식해야만 했던 고종의 고뇌와 궁궐을 뒤로하고 다른 나라 외교관에 피신해야 했던 비운의 운명이 배어있는 곳이다. 고종은 과연 이 곳 정동 언덕에서 한양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광명 그치지 않는 곳’

구 러시아공사관에서 내려와 조금만 걸으면 정동 극장 옆으로 ‘중명전’(사적 제124호)을 알리는 작은 푯말이 세워져 있다. 내부 관람은 지난 8월 말부터 시작됐는데 인터넷 예약 접수를 하거나 현장 접수(선착순 5명)를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고종은 구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며 덕수궁 주변을 새롭게 조성할 것을 지시했고 1897년 마침내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1897년(광무 1) 이 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했지만 1904년(광무 8) 대화제로 중화전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등 전각이 소실 되면서 중명전으로 옮겨야만 했다.


# 고종은 이 곳에서 국사에 임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현재 주미대사관과 맞붙어 있는 ‘중명전’은 당시만 해도 덕수궁 담장 안에 있던 부속 건물이었다. 중명전(重?殿)의 현판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밝을 명’(明)이 아닌 ‘눈 밝은 명’(?)이 쓰였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으로 1897년 황실도서관으로 탄생했다. 역시 사바찐이 설계한 서양식 전각으로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다.


# 중명전 2층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1907년 아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약 3년 반 동안 국사를 처리한 곳으로 사실상 대한제국의 운명이 이 곳에서 갈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고종이 이 곳에서 머물던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선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강제로 이뤄진다.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으며 통감부를 설치해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울분을 못 이긴 고종이 2층으로 올라갔고 10여명이 모여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층 왼쪽 방에서 ‘을사늑약’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은 ‘을사늑약’ 이후 각국 외교관과 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내 조약의 무효성을 알렸는데 그 분량만 한 트럭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전국 유생들의 항일 상소가 빗발쳤고 민영환 조병세 등은 자결로서 항거했다. 민종식 최익현 등 각지의 유생들은 의병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들을 ‘을사의병’이라고 한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며 항일 여론을 고조시켰는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도 바로 이 때 나왔다.




고종은 또 ‘을사늑약’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이뤄졌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는데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중명전 어딘가에서 하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특사들은 비록 회의장 안엔 들어가지 못했지만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만국평화회의보’와 각국 신문기자단이 모인 국제협회에 한국 정부의 입장을 알리는 등 외교적 노력을 펼쳤다.
당시의 시대상과 아픔을 보여주는 각종 전시물들이 선보인다. 을사늑약문, 외신에 보도된 고종의 ‘을사늑약’ 무효 친서, 헤이그 특사 위임장, 헤이그특사의 탄원서, 고종의 어진 등을 비롯 각종 사진?문서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고종의 황제 어새도 전시돼 있는데 당시 자료들을 보면 4-5개 정도 존재했다고 한다.




중명전은 고종이 덕수궁으로 옮긴 이후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으로 쓰이다 1925년 화재로 전소된 것을 다시 재건했다. 1963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했으며 1976년 민간에 매각된 것을 1983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했다.
2003년 정동극장이 인수했으며 2007년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됐으며 올해 복원이 완료돼 일반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했다. 민간 소유로 있을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과 관련해 회자됐던 곳이기도 하다.
고통으로 얼룩진 덕수궁을 제대로 관람하기 위해선 고종의 파란만장한 삶이 배어있는 구 러시아공사관과 중명전을 먼저 돌아보는 게 좋다. 구한말 강제로 나라를 빼앗겨야만 했던 우리의 아픈 역사가 초겨울 차가운 바람과 함께 뼛속 깊이 다가온다.

-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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