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밭뙤기 장사 옥말임 씨-2회



밭뙈기 장사 30년 생활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떤 말이 나오는가, 하고 물었더니 옥말임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사 마 천국 같은 것을 믿지는 않지만, 이기 바로 천국이 아닌가 싶더라. 그 생각은 지끔도 뭐, 여전하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내는 마 그 일 하고 싶다. 생각해봐라. 내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기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노.”
밭뙈기 장사 일이 천국의 삶과 같다는 옥말임 씨의 말을 보다 명확히 구체적으로 풀이하자면 그 일이 자신의 체질에 딱 맞는다는 얘기가 된다. 그 일이 자신의 체질에 딱 맞는 이유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자유다.
밭뙈기 장사에는 자유가 있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심리적인 자유가 거의 무한대로 펼쳐져 있었다. 사업자등록증 상의 주소는 대구지만 그의 몸은 이미 대구에 묶여 있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서늘한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고랭지 배추를 취급하고 추운 겨울에는 제주도에서 당근이나 제주도 특산 무를 취급한다. 경상도 낙동강 주변에 태풍 피해가 발생하면 전라도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전라도에 태풍 피해가 발생하면 경상도를 무대로 판을 벌인다.
옥말임 씨가 특히 밭뙈기 장사를 천국에 비유하는 까닭은 아무래도 그 자신의 성별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서 여자로만 살다가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남자들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한 그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했다.



“그놈의 감옥 같은 여자 노릇 인제 그만 할란다. 그런 마음이었을 끼라.”
그렇다면 밭뙈기 장사는 거의 모든 여성들에게 딱 맞는 직업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거의 모든 여성들이 여자로서의 피해의식이랄까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옥말임 씨는 그것도 아니란다.
“보소, 보소, 남자는 모른다. 애면글면하며 기다리는 재미가 얼매나 큰데.”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더듬어 들어가야 했다. 그의 말인즉 요컨대 애면글면 기다리는 재미에서 벗어나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의로 그 세계를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남편에 의해 튕겨나온 형국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살림을 작파하고 절간으로 들어가 버린 남편, 그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서 그는 아마 우주 대폭발에 버금가는 충격을 느껴야 했을 터이다. 가슴이 폭발해서 산산조각이 나버린 사람에게 집은 이미 집이 아니라 감옥 중에서도 형편없이 초라한 감옥이었을 터이다.
그러니까 그는 엄밀하게 말해서 돈을 벌 목적으로 밭뙈기 장사의 길로 들어선 게 아니었다. 형식상으로는 새끼들과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지만 내용상으로는 전혀 그게 아니었다. 떠나버린 남편과 세상을 향해 뭔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본다는 마음으로 뛰어들었던 셈이었다. 때문에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을 찾아다녔고, 익숙한 고장보다는 멀리 낯선 고장으로 원정을 나가서 그야말로 좌충우돌 부딪히며 자기만의 길을 열어나갔다.
만약에 그 일이 초창기에 심하게 흔들렸거나 가진 돈을 죄다 까먹었다면 아이들 곁으로 돌아와서 소박한 행복을 노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처음부터 기대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강원도에서건 전라도에서건 지나는 길에 채소밭을 발견하고 저것이다 싶어서 주인을 만나 계약을 하고 나면 반드시 돈이 되어 돌아왔다. 이 점에 대해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내 친구 중에 몇몇이 나 하는 것 보고 따라서 이 장사를 했다 아이오. 그래서 우째 됐는지 알아요?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돈을 벌자고 애달카달, 그러면 절대로 돈 안 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후배 한 명이 생각났다. 오래 전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오직 돈을 벌 목적으로 2년 동안 나가 있다가 돌아와서 뭔가 자영업 거리를 찾다가 밭뙈기 장사에 뛰어든 후배가 있었다. 가락동 농산물 시장에서 일하는 친척의 권유로 시작한 일이었다. 결과는 일 년도 채 안 되어 대패,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옥말임 씨의 해석대로라면 그 후배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실패한 것이 되는 셈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 내가 하는데도 그 일이 나를 즐겁게 못 한다면 그런 일을 멀라고 할 것이냐. 돈은 나중이제. 돈을 먼저 생각하면 돈은 절대로 나한테 안 온다.”
이것은 일종의 직업윤리에 관한 발언이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최소한의 자긍심도 갖지 못한다면 그런 일은 당장 그만두는 게 좋다는, 오직 하나 돈 때문에 어떤 일을 한다면 나중에 반드시 돈으로부터 보복을 당한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러한 직업윤리에 지나치게 충실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돈을 벌었다. 그의 배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채소가 많이 생산되는 것으로 유명한 고장이라면 으레 그의 지시를 받는 작업반장이 한두 명씩은 있었고, 전국의 모든 야채 도매시장의 경락가격이 그의 귀로 들어왔다. 돈은 이제 사람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제3의 무엇이 되어갔다. 돈의 필요에 의해 사람이 존재하는 형국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 어떤 역설적인 상황 속으로 그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로 20년을 넘어 30년 가까이를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망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자신의 패배를 깨닫기 시작한 것은 결혼한 딸 둘이 모두 이혼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그동안 자식들을 사랑이 아닌 돈으로 키웠다. 가정부와 가정교사를 자식들에게 붙여두고 자신은 객지를 돌아다니며 매달 돈이나 보내는 것으로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자식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고 연락이 오면 사건의 내용에 관한 질문이나 사과의 말은 나오지 않고 “얼마면 되겠노”하는 말부터 튀어나왔다. 한참이 지나서야 문득 “잘못했나?”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이내 ‘뭐 별 일 있겠나“하는 식으로 잊혀졌다.
가정교사를 둔 덕택으로 아이들의 학교 성적은 항상 중위권에서 상위권을 넘나들었다. 큰딸은 배우를 한다고 그쪽 방향으로 진학했고, 작은딸은 의상디자이너를 한다고 역시 그쪽 방향으로 진학을 했지만, 두 딸 모두 꿈만 있고 소질이나 열성은 없었던 것인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부터 유학을 가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어서 유학을 보냈다. 누나 둘이 모두 외국으로 떠나는 것을 본 막내아들이 자기도 유학을 가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어서 아들 또한 자신의 관심분야라고 하는 중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옥말임 씨의 자식농사는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그 동기와 과정,  결과 모두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옥말임 씨 자신에게 있었다. 국내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유학을 간 현지에서 딸들은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이 연애질이나 하며 임신한 줄도 모르는 채 돌아다니다가 큰딸은 배가 남산만 해져서 돌아왔고, 작은딸은 자살한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현지 신문에까지 실리는 등으로 망신만 당한 채로 돌아왔다.



큰딸은 그나마 남자 쪽에서 곧장 결혼을 한다고 나서주어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작은딸은 사정이 복잡했다. 작은딸이 자살소동을 벌인 이유도 실은 남자의 꽁무니를 빼는 태도 때문이었다. 자살소동 덕택으로 귀국할 때 같이 와주기는 했지만 이내 달아나 버렸다. 달아난 남자를 찾느라 흥신소 직원까지 동원하는 등 한 달이 넘도록 눈에 불을 켜고 뛰어다녀야 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찾아낸 남자로부터 결혼동의를 받아냄에 있어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역시 돈이었다. 여자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첫째 조건은 무조건 돈이라는 관념이 옥말임 씨에게 있었다. 그리하여 고급 승용차에 아파트 한 채, 그리고 대구시내 요지에 레스토랑을 열어준다는 조건으로 겨우 결혼을 시키고 실제로 결혼 뒤에 그 약속을 모두 이행했지만, 그러나 그 결혼생활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중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난 막내아들의 경우는 보다 심각하고 복잡했다. 처음 중국유학을 떠난 뒤로 십년 남짓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막내아들은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 일대를 안방 드나들듯 해 오고 있었다. 무슨 모피 수입을 한다느니, 녹용가공 공장을 인수하기로 했다느니 등등 그때마다 이유는 있었지만 돌아온 뒤에는 언제나 빈손이었다. 그리고 다시 나갈 때는 또 다른 이유를 내세우며 손을 벌리는 것이었다. 이제 옥말임 씨는 ‘돈 나와라 뚝딱’ 하면 돈이 나온다는 도깨비 방망이를 가졌다 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때가 바로 그 즈음이었다. 그때 그는 이미 나이가 예순을 바라보고 있었고, 상당한 규모의 빚을 안고 있었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만나던 날 그는 자신에게 빚이 많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내 몸을 된통 찢어서 빚쟁이들에게 준다 해도 내는 인제 할 말이 없는 기라.”
그러나 그는 웃고 있었다. 빚이야 까짓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갚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문제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언제 어떤 계기로 해서 먹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해온 가락이 있어서 아직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도 그는 그림 전시회가 있으면 달려가서 그림을 사주고 있었다. 가는 길에 책방을 발견하면 반드시 차를 세우고 들어가서 책을 사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했다. 그림에 관심을 갖고 후원을 시작한 것 역시 얼마 안 되었다. 돈을 버는 방식에는 달통했으나 그것을 쓰는 방식에는 영 깜깜절벽이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그런 식으로 돌아보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점심을 사준다고 나가자 해서 나갔더니 문득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내 눈에 꽃이 꽃으로 보이기 시작하네, 요새. 암만 해도 이 날을 위해서 삼십 년을 정신없이 살아왔는 갑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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