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은 그림자도 만날 수 없는 ‘법정(法頂)’스님
이제 남은 그림자도 만날 수 없는 ‘법정(法頂)’스님
  • 승인 2010.12.2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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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12월 31일 이후 절판되는 법정스님의 모든 책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이해인 수녀의 법정 추모글 중에서)

지난 3월 11일 종교와 계층을 뛰어넘어 모두의 마음 한켠에서 늘 목탁처럼 맑고 깊게 울리는 가르침을 선사했던 또 하나의 큰 스승이 입적했다. 법정(法頂) 스님은 타고난 문학성과 정갈한 문체, 핵심을 꿰뚫는 영혼의 가르침으로 식자층과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인기를 구가했지만, 평생 출가한 불자이자 수행자라는 본분에 충실했다.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도 유명한 김영한 여사로부터 1996년 기부받은 성북동 대원각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창건한 후 맡았던 회주 자리가 평생 유일한 ‘권력’이었던 셈이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라난 법정 스님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고뇌에 빠져든다. 대학생이던 1955년 출가를 결심하고 먼 길을 떠난 스님은 서울 안국동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삭발을 한 뒤 영원한 불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통영 미래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면서 환속 전의 고은 시인과도 함께 공부하며 지리산 쌍계사로 옮겨 정진을 계속한다.
법정 스님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개발, 독재 시대에도 함석헌, 장준하 등과 더불어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를 저버리지 않는 구도의 길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억압적인 상황,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을 비판하고, 그 속에서 절망하는 현대인에게 띄우는 위로와 사색의 글은 ‘서 있는 사람들(샘터사, 2003)’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적이 많아진 불일암 생활을 17년 만에 접고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살다 간 법정 스님. 비록 오두막에 가진 것은 없었지만 법정 스님은 종파를 뛰어넘어 정도를 걷는 사회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며 섬세한 붓과 날카로운 시선을 놓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스님이 남긴 무소유의 정신은 많은 이들의 정신과 삶을 더욱 풍요롭게 이끌었고, 스님은 입적을 앞에 두고도 세상에 남기고 간 글빚과 흔적을 염려했다.
침묵에서 건져 올린 지혜를 어느 시인보다도 간결하고 정제된 감성 언어로 빚어낸 우리 시대의 진정한 구도자. 법정 스님은 의연하고 굳은 삶이 남긴 진리와 철학을 이제는 진정 가슴에만 남겨야 하는 때가 다가왔다.
“모두 이 세상에 초대받은 나그네들, 서로 닮지 말고 각자 삶의 몫을 다하십시오.”
법정 스님의 세상에 남긴 귀한 말씀과 사색의 흔적들, 스님의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도서는 ‘텅 비우되 충만하고, 버리고 떠난다’는 유지에 따라 오는 12월 31일까지 판매되고 모두 절판된다. 입적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야속할 정도로 청정한 구도자의 삶을 마무리한 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는’ 길. 그 누가 스님의 뜻을 어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또다시 법정 스님이 남긴 말과 글을 속세에서 비우고 나그네 길에 서서 스스로의 삶과 각자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더 소박하게
적게 가질수록 더욱 사랑할 수 있다
어느 날엔가는 적게 가진 그것마저도
다 버리고 갈 우리 처지 아닌가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서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일상의 소용돌이에서 한 생각 돌이켜,
선뜻 버리고 떠나는 일은 새로운 삶의 출발로 이어진다.

미련 없이 자신을 떨치고
때가 되면 푸르게 잎을 틔우는 나무를 보라.
찌들고 퇴색해가는 삶에서 뛰쳐나오려면
그런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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