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궁궐 나들이 5 덕수궁 네번째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조선 5대 궁궐 중 아픈 역사가 가장 많은 덕수궁과 그 인근을 둘러봅니다.


#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덕수궁은 또 다른 궁궐의 멋을 느끼게 한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아픔을 겪은 고종은 덕수궁에서 부흥의 꿈을 꿨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덕수궁(당시 경운궁)을 다시 세워 일으키며 조선 왕조의 부활을 위해 정성을 쏟았다.
중화문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등 궁궐의 기본 구조대로 남쪽을 향해 있었으며 역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의 ‘화’자를 이름에 넣었다.
덕수궁의 본래 정문인 ‘인화문’도 중화문 앞 남쪽에 있었다. 대한제국 출범 직후 환구단이 건설되고 궁궐의 동측이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되면서 원활한 기능 수행을 위해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본래 이름은 대안문)을 정문으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과 답도, 실내모습

1904년 ‘의문의 화재’

보물 제819호로 지정된 중화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1902년(광무 6) 창건 당시엔 2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됐고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됐다.
중화전 천장의 용 문양이나 기단부 계단 중앙의 답도에 새긴 용 문양, 황색으로 칠한 창호 등에서 고종의 정성이 엿보인다. 1904년 일어난 의문의 화재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화려했을 것이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아궁이에서 큰 화재가 시작됐다고 하는데 구조를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일제가 일부러 방화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물증이 없다.”
화재와 일제 시기를 거치며 중화전 마당 둘레에 지은 행각들도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약간의 형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내부 복원 공사가 한창인 석조전과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석조전 서관.


중화전 건립 후 편전으로 쓰인 즉조당과 석어당은 덕수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이다.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을 때부터 사용됐다. 즉조당은 중화전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정전의 역할도 담당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던 광해군과 인조가 모두 이 곳에서 즉위했으며 고종의 후비인 엄비가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했다.


# 덕수궁 풍경

석어당은 덕수궁 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층 전각이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됐으나 다시 중건됐다. 다른 전각과 달리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특히 아래층엔 고종 어필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선조가 이 곳에서 승하해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를 추모하는 곳이기도 했다. 궁내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 화려함 보단 검소하며 소박한 느낌을 주는 살림집 같다.
1623년 대부분의 전각과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을 때도 두 건물만은 보존해 경운궁의 상징으로 삼았다.

‘안녕과 평안’ 기원

덕수궁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머물렀던 선조 때만 해도 부득이 격식을 갖추지 못했다. 고종 때에야 궁궐 영역이 한껏 넓어지고 규모와 격식도 제대로 갖추게 됐다.
한일병합 이후 덕수궁의 전각과 부지를 조금씩 허물어내던 일제는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을 본격적으로 해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1931년엔 궁궐을 아예 상가 부지로 매각하려다가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한발 물러나 외전과 내전의 주요 전각을 남긴 상태로 공원화해 1933년 일반에 개방했다. 오늘날 덕수궁에 남은 전각들은 그렇게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지킨 것이다.



# 고종이 승하한 함녕전

내전의 주요 전각인 함녕전은 고종의 편전이자 침전으로 사용됐다. ‘독살설’이 나도는 고종이 1919년 승하한 곳도 바로 여기였다. 함녕전이 ‘안녕’과 ‘평안’을 뜻하지만 정작 고종의 삶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함녕전은 후에 새로 세운 것이다. 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들였고 사방에 방을 두른 전형적인 침전 양식이다. 함녕전 뒤엔 계단식 정원을 꾸몄다.


# 고종이 커피를 즐겨마셨던 정관헌을 한 외국인이 관심있게 보고 있다.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에 왕비의 침전이 따로 없는 것은 명성황후가 승하한 뒤, 고종이 다시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비의 침전을 대신한 것은 명성황후의 신주와 위패를 모신 경효전이었다. 경효전은 1904년 대화재 때 소실되고 그 자리에는 덕홍전이 세워졌다. 덕홍전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지은 전각으로, 외부는 한옥이지만 내부는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등 서양식으로 꾸몄다.


# 정관헌 내부

덕홍전에서 정관헌으로 이어지는 꽃담과 꽃담에 낸 무지개 모양의 유현문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던 두 전각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룬다.

임정과 미소 공동위원회

덕수궁은 고전과 현대가 어우러진 곳이다. 그 대표격인 석조전엔 이전 궁궐이 가진 기능들이 모두 집대성됐다.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서양식으로 지은 석조전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1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시설, 2층은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 3층은 황제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됐다. 1층은 신하들과 궁궐 사람들의 업무공간, 2층은 외전, 3층은 내전으로 봐도 무방하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해 1910년 완공했다.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중앙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건물의 전면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했고 1938년 서관을 증축하면서 서양식 분수정원도 조성했다.


#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즉조당

1933년 이후 이왕가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내부 원형이 훼손, 변형된 것을 현재 바로잡는 공사를 하고 있다. 덕수궁 임정 정무처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기도 했다.
1938년 완공한 석조전 서관은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관은 몸통에 코린트식 현관을 덧붙인 모습이다.
한쪽에서 역시 공사중인 준명당은 1904년 대화재시 소실된 즉조당과 석어당이 다시 지어질 때 함께 지어진 건물이다. 고종의 편전으로도 쓰였으며 1916년엔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도 사용됐다. 준명당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돼 있다.

‘커피 애호가’ 고종

정관헌은 함녕전 뒤편에서 궁궐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해 지은 전각이다. 석조전이 전형적인 서양식 건물이라면 정관헌은 서양 건축에 전통양식을 섞었다. 커피 애호가였던 고종은 이 곳에서 외국 외교관들과 연회를 열고 커피를 마시며 자주 찾았다고 한다.


# 선조가 승하한 석어당

정관헌은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갖고 고민에 잠겼을 고종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 이름 걸맞게 조용히 궁궐을 내려보는 형상이다. 1900년 경 당시 유명 건축가인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줄지어서 내부 공간을 감쌌고 동남서 세 방향에 베란다를 마련했다. 베란다의 기둥은 목조이며 기둥 상부에 청룡, 황룡, 박쥐, 꽃병 등 한국의 전통 문양을 새겼다.



# 꽃담과 후원 풍경

덕수궁은 고종 당시의 규모에는 못미치지만 요소요소에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산책로는 도심 생활의 피곤함을 풀어주는데 적격이다.
하지만 피난 생활을 해야 했던 선조,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반목과 갈등, 고종의 고심이 깊이 배인 역사적인 장소기도 하다. 서구 열강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과 일제의 침탈 강도도 다시 느껴볼 수 있다. 일제는 덕수궁의 완전한 복원이 불가능할 만큼 필수적인 자료들까지 모두 없앴다고 한다.


# 수리 중인 덕흥전      

덕수궁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 싸들고 와서 소풍가는 기분으로 휙 돌아보고 가는 걸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며 “아픈 우리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는 의미있는 발걸음이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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