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숭인동 길 레스토랑 그곳엔 ‘사람’이 있다




술 취한 과일장사 동생과 문어총각

이미 컴컴해졌다. 봄이 오면서 해가 길어졌다. 그래도 저녁 7시면 어둡다. 바람이 분다. 봄 바람 치고는 세차다. 지난해 수확하다 남은 밭이랑의 찢겨져 나부끼는 비닐 종이처럼 포장마차의 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펄럭인다. 이런 날이면 익산떡, 길레스토랑 문 여는 것을 망설인다. 사실 포장마차는 추위도, 비도, 더위도 별거 아니다. 별거는 바로 요놈의 바람이다. 세찬…. 요놈의 바람은 익산떡에겐 최대의 적이다. 장애다. 그래서 익산떡, 바람 세차게 부는 날에는 나왔다가도 그냥 후퇴한다. 그런 날엔 포장마차를 한바퀴 돌아보는 게 일이다. 길레스토랑이 문을 여는 시간은 오후 5시30분경이다. 신문사가 있는 사무실에서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익산떡이 내려다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인들과 인사말을 나누는 것인데,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익산떡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이젠 막걸리를 시키지 않아도 화자의 탁자 위엔 막걸리 두 통이 놓여진다. 이심전심…염화미소다. 안주는 아직도 매번 골라야 한다. 화자, 임 부장 정도 수준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길레스토랑에 들어가면 두가지의 소음이 귀청을 때린다. 하나는 물론 익산떡의 목청이고, 또다른 하나는 경마장에서 나오는 말꼬리 잡는 소리다. 스크린 경마장이다. 길레스토랑과 신문사 사무실이 있는 이곳엔 지난해 여름까지 한 개의 경마장이 있었다. 마사회에서 운영하는 장외발매소다. 그런데 가을 또 한 개의 경마장이 문을 열었다. 기존 경마장에서 1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원래 경마장은 토요일과 일요일만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경마장이 들어서면서 금요일도 문을 연다. 금요일 아침이 되면, 이곳엔 말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경마를 하는 사람들을 그쪽에선 그렇게 부른다.)이 몰려든다.
길레스토랑에 `말꼬리 잡는` 소음을 안겨주는 경마장은 그 경마장과 또다른 경마장이다. 1년 내내 24시간 할 수 있는 스크린경마장, 경마게임장이다. 화자는 스크린 도박이라고 과감하게 칭한다. 바로 거기서 나오는 소음이다.
거기에 필적할만한 소음 하나가 추가되는 날도 있다. 바로 난데 없이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과일장수의 찢어질 듯한 고성이다. 정확하게 무슨 말을 외쳐대는지 분간조차 힘들 정도로 소음은 크다. 대충 간추려보면 "과일 사려…!! 귤이 몇 개에 얼마!!"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정체를 파악해내기 위해 헤매고 있을 때 익산떡이 거든다. "아이고, 저놈 조용조용히 좀 하라니까…." 저놈?? 맞다. 익산떡이 아는 사람이다. 동생뻘 된단다. 물론 길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것일 게다. 익산떡, 동생 많아서 좋다. 길레스토랑에 들르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익산떡을 "누님!!"이라고 부른다. 익산떡, 동생들에게 가차없이 말 깐다.
가만히 고성을 듣다보니 왠지 목소리에서 알콜 기운이 느껴진다. 익산떡, 설명 따라붙는다. "저놈은 맨날 술 쳐마시고 과일 판다니까…."
목소리가 길레스토랑 안으로 파고 든다. 주인공이 들어온 것이다. 불콰해진 얼굴, 허르스름한 차림새…. 신체가 약간 불편한 것 같다. 이미 잔뜩 취한 게 단박에 느껴진다. 그런데 익산떡 누님보고 술 더 내놓으라고 조른다. "아따, 안된당게!! 그렇고롬 많이 퍼부어 놓고선…." 술취한 사람에게, 설사 친동생이라 할지라도 절대 술 잔 내줄 익산떡 아니다. 그런데 하물며…. 잠시 실랑이가 오가고 결국 술취한 과일장사 동생 물러난다. 다시 들려오는 "과일 사려…!!"
그리고 그 순간 한 사내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선다. 작은 키, 군인처럼 짧게 자른 머리. 얼굴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쌍꺼풀진 눈…. 이미 몇차례 보았던 68년생의 사내다. 68년생은 화자와 일행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단지 자기보다 나이가 몇 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익산떡 같으면 단박에 말 내렸겠지만 소심한 화자, "형님"이라고 부르는 동생한테 말을 내리지 못한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68년생은 철저히 혼자다. 그리고 항상 삶은 문어를 안주로 해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마신다.
이 날도 마찬가지. 삶은 문어를 주문했다. 소주 한 병을 마셨다. 맥주 한 병도 마셨다. 예정된 프로그램대로라면 68년생은 여기서 끝을 맺고 레스토랑 무대에서 사라지게 돼 있다. 어라, 그런데 이날은 아니다. 맥주 한 병을 더 시키는 게 아닌가. 그리고 화자와 일행에게 말을 붙여오기 시작했다. 태도가 심상치 않다.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틀에 박힌 듯한 일상에 젖어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변화`는 `두려움`이다. `공포`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화를 거부한다. 변화하면 큰 일이라도 일어날 것으로 지레 겁을 먹는다. 틀 안에서 안주하길 원한다. 화자와 일행도 마찬가지. 그런데 변화는 예상했던 것 보다 좀더 심각한 수준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68년생의 말투가 갑자기 무지무지하게 흐려지면서 혀가 꼬이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마실 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상대방의 안색을 살필 줄 알았다.
맥주 잔이 건네졌다. "혀엉님들, 제가 한 잔 사알게요∼." 싫다고 손사래를 쳐도 끄떡 하지 않는다. 무작정 밀어붙이기다. 이 일을 워쩌나. 뭐 술이야 마다 할 족속들이 못되지만, 그래도 막걸리에 맥주를 섞는다는 건 아무래도 좀…. 방법은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일 터. 그렇지만 68년생 아우님의 밀어붙이기는 좀처럼 끝이 나질 않는다.
거기가 이제 시비까지 걸어온다.
"왜? 내가 사는 술 마시면 안되는 거야??"
"……."
분위기를 파악한 익산떡이 재빨리 나선다.
"아따, 이 분들 맥주 안 마시니까, 그냥 혼자서 마셔∼그리고 오늘 많이 취했구먼."
68년생 이번엔 익산떡으로 `변화`의 방향을 돌린다. 초지일관 시비조다. 약간의 실랑이가 이어지고, 결국 익산떡 바깥 사장님이 출두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된다.
68년생 쌍 `ㅅ`자를 내뱉으며 무대 뒤로 퇴장한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냥 못이기는 척 한 잔 받아마시면 됐을 터인데…. 아니, 그게 다가 아니다. 그래도 한 편으론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날 68년생의 태도를 봐선 결코 한 잔으로 끝을 낼 품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산떡의 덧붙여지는 얘기가 확신을 갖게 한다. 이전에도 그런 적이 한 번 있었다는 것. 어느 순간 갑자기 돌변하더니 전혀 다른 사람이 돼서 손님들에게 행패를 부리더라는 얘기였다.
익산떡 빼놓지 않는다.
"평상시엔 참 착한 총각인디…."
그날 그 일이 있은 뒤로 68년생은 다시는 그 레스토랑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삶은 문어를 먹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가 떠올라 익산떡에게 묻곤 했지만 단 한번도 들른 적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다음호 계속
정서룡 기자
sljung99@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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