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굴참나무의 속삭임

눈을 감고 서 있으니,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안녕하세요?” 새들만 지저귀는 조용한 산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이 감미롭다.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둘러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 소리는 크지도 않고, 우렁차지도 않다. 그렇지만 확실하다. 주저리주저리 이어지고 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 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온 몸에 그대로 전해진다.



옛날의 이야기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보다도 더 오래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에는 구수한 냄새가 깃들여있다. 따뜻함이 있다. 할머니의 자식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듣고만 있어도 가슴이 훈훈해진다. 할아버지의 오붓한 마음이 담겨 있어서 듣기만 하여도 포근해진다. 도란도란 들려오는 옛날이야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고향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고, 어머니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소곤소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굴참나무다. 도토리가 열리는 굴참나무다. 가지가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한 눈에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을만큼 오래된 나무다. 몰아치는 비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냈고 하얗게 내리는 눈도 맞았다. 그 오랜 세월을 묵묵히 한 자리에서 버텨냈다. 모진 바람을 맞으면서 단단해졌고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도 당당하였다. 그러니 들려줄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이곳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위면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공원 백양사다. 나무는 고불총림 백양사 입구의 길 양 옆에 자리하고 있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의 모습에서 그 연륜이 보인다. 얽혀 있는 형상에서 세월의 흔적들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산사로 향하는 길에서 오랜 질곡의 세월을 보내면서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들이다. 그러니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안내판은 700년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굴참나무 숲이라고 일러준다. 나무의 껍질이 갈라져 있다. 갈라져 있는 껍질 사이에는 세월들이 내려앉아 있다. 그 사이에는 숱한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700년 전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요 근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가슴이 떨린다. 고려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나무는 그 것을 전해주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은 들으려하지 않는다. 난감한 일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오관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아주 지극히 작은 것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면 그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청각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면 그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세상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귀로 들을 수 있는 세상도 마찬가지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상도 그렇다. 극히 일부분만을 감지하고서 세상을 전부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 말라…. 굴참나무가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훨씬 더 많고 듣지 못하는 세상이 훨씬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눈으로 보는 세상 너머의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열정이 필요하다. 열정이 없이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모두 다 볼 수 없다. 아무리 다 듣고 싶어도 다 들을 수 없다.



겨울 백양사에서 굴참나무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볼 수 없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됐다. 새롭게 들어선 세상의 모습은 경이롭다. 이런 세상이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단조롭기만 하던 세상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가슴이 뛰고 날아갈 것만 같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겨울 연등

쌍계루를 돌아서니 환한 연등이 반겨준다. ‘이 무엇고?’ 비석을 바라보면서 사천왕문을 들어서니, 연등이 바람에 흔들린다. 보리수나무에도 연등이 걸려 있다. 천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닮아 있다. 화엄 세상으로 들어가는 계단처럼 느껴진다. 수행을 하고 덕을 쌓으면, 저 계단을 따라 화엄 세상에 들어설 수 있을 것만 같다. 연등의 오묘한 힘에 시나브로 빠져 들어간다. 그 힘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기운만큼은 확연하게 느껴진다.



연등은 초파일에 단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런데 겨울에 연등을 보니, 묘한 느낌이다. 연등은 어둠을 밝혀주는 길잡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들에게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연등이다. 연등이 있는 곳에서는 방황하지 않고, 연등이 있는 곳에서는 지혜로서 살아갈 수 있다.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길을 밝혀주었다고 하여 사월 초파일에 등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초파일이 아닌 한 겨울에 연등을 보게 되니, 새롭다.

사람들은 연등 아래에서 인생과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찾고 있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찾기 어려운 삶의 길을 연등을 바라보면서 찾아본다.



눈을 감는다. 잡념을 털어버리고 나를 본다. 나의 깊은 곳을 바라다본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인다. 걸어온 길이 걸어가야 할 길보다 더 많아진 시점에서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나를 본다. 움켜잡고서 놓지 못하는 탐심으로 인해 더욱 더 방황하고 있는 나를 본다. 가만히 놓아버리면 되는 것을, 그 것을 펴지 못해 헐떡이는 나를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온다.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아서 허우적거리는지 알 길이 없다.

가만히 손을 펴면 된다. 그저 마음을 비우면 된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캄캄하던 길이 갑자기 환해진다. 만사형통이다. 보지 못하던 세상을 보게 되고 그 속으로 걸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더듬거리면서 나갈 때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앞이 훤히 보이는 세상을 걸어가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고, 힘이 들지도 않는다.






겨울 산사의 연등을 보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살핀다. 보이지 않아 고통스러웠던 길이 훤해지는 것 같다. 새롭게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갖게 된다. 앞이 보이니, 두려울 것이 없다. 보이는 세상을 걸어가게 되니, 하나도 힘이 들지 않는다. 고통스럽지도 않다. 앞을 보면서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는 일이다. 손을 펴니 편하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연등이 밝혀주는 새로운 세상 속으로 가벼운 걸음을 옮긴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