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두둥실 떠다니는 얼음에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도 온다, 봄이…
바다 위 두둥실 떠다니는 얼음에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도 온다, 봄이…
  • 승인 2011.03.0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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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가는 겨울, 오는 봄



바다가 전해주는 봄소식 

바다 위 얼음이 두둥실 떠다닌다. 찰랑이는 파도 너머 언뜻언뜻 비치는 자태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포근하다. 잔잔한 바닷물은 남쪽나라로부터의 봄소식을 전해준다. 마음이 두근거린다. 따뜻한 봄의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이곳 전북 부안의 신시도에서 내려다보는 서해 바다는 잔잔하기만 하다. 안개 속에 잠겨버린 새만금방조제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보이지 않으니 더욱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이 발동한다. 짐작할 수는 있다. 남쪽나라로부터 불어오는 봄바람의 기운 덕분이다. 정녕 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바닷바람에 실려 있는 봄소식을 들으며 봄을 누릴 준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즐기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준비하는 것이다. 봄은 준비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다가오기 때문이다.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다.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마음은 겨울로 가득하다. 유난히도 혹독하였던 계절. 온 몸의 구석구석까지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몸 세포 하나하나에 남아 있는 겨울을 말끔하게 지우지 않고서는 봄을 누릴 수 없다.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담을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 다음엔 관찰해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누리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한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관을 통해서 보는 것은 물론이요, 마음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관찰하지 않고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살랑살랑 바닷바람,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봄소식이 들려온다. 둥둥 떠다니는 얼음에도 봄은 담겨있다. 눈을 감으면 느껴진다. 정녕 봄은 오고 있다. 가슴이 설렌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길이 없다. 혹독하였던 겨울을 밀어내며 다가오는 봄을 맞기 위해 몰입과 열정을 준비해야겠다. 그럴 때 봄은 더욱 눈부시게 아름다워질 수 있다. 꽉 닫고 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본다. 사랑이 넘실거린다. 그 사랑으로 마음껏 누려야겠다. 저만치 오는 봄을….

이 지독한 짝사랑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청둥오리들이 몰려 있다. 장관이다. 호수는 꽁꽁 얼었다. 그 한가운데 타원형으로 얼음이 녹은 부분엔 물결이 출렁인다. 경계선을 중심으로 수많은 오리들이 모여 있다. 이야기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듯하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에게 있어서 추위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가 보다.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참으로 좋다. 사람들은 이곳을 오리알 방죽이라고 부른다. 천년여전 도선국사가 오리들이 번성할 것이라고 예언한 곳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 오리들이 좋아할 조건은 하나도 없다. 꽁꽁 얼어붙은 데다 칼바람까지 휘몰아치고 있다. 어찌나 추운지 서 있기조차 힘들다. 그럼에도 오리들은 아랑곳 않는다. 아니 그런 환경을 즐기고 있다.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바라보는 나는 혹독한 추위에 곤욕스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정작 추위에 떨어야 할 당사자인 오리는 행복에 젖은 모습이다.

세상일이란 이렇듯 모두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양지가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음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다. 어두운 면은 아예 외면해버린다. 양지가 있으니, 그에 상응하는 음지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음지를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세상살이는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짝사랑은 외사랑이다. 대상이 외면하는 사랑이다. 아니 사랑받는 사람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로운 사랑이다. 그래서 슬프다. 처연하다. 언제나 한쪽이 텅 비어 있는 서러운 사랑이다. 그렇지만 사랑으로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갈 수 있다. 사랑하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다. 짝사랑은 멈출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멈출 수는 없다. 그러니 언제나 위태롭고 불안하다.

유난히 추운 겨울, 불안함의 나날이다. 삭풍은 왜 이리도 몰아쳐대는지 야속하기만 하다. 폭설도 지긋지긋하다. 칼바람이 부는 밤마다 애를 태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매일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시간이다. 온 정신이 현관문으로 쏠린다.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본다. 정작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 괜한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눈이 내린 길은 미끄럽기 그지없다. 거기에다 칼바람까지 불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딸만 셋이다. 딸을 가진 아빠의 마음은 언제나 위태위태하다. 세상이 험하니,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회면에 오르는 기사 하나하나가 모두 다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삭풍이 몰아치는 계절이니, 걱정은 더욱 커진다. 아무리 당부하여도 딸들은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다. 돌아서면 그만이다. 괜한 걱정을 한다며 오히려 웃는다. 그리고는 무시해버린다. 그럴 때마다 불안한 마음은 극에 달한다. 아빠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딸들은 제멋대로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딸들을 기다리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아빠! 기우가 뭔지 아세요?” 이런 모습을 보고 큰 딸이 웃으면서 묻는다. 물론 안다. 그렇지만 그 것은 절대로 기우가 아니다. 사랑하는 딸을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이 어찌 기우란 말인가? 그것은 말이 안 된다. 아빠 생각은 조금도 해주지 않는 딸을 보며 짝사랑의 비애를 절감한다. 냉랭한 녀석의 태도를 보면서 이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돌아서면 눈앞에 어른거리는 녀석들의 얼굴을 어쩌란 말인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짝사랑은 나의 숙명인가 보다. 그들이 있어 내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

느낌이 없는 책은 읽으나 마나다. 깨달음이 없는 종교 또한 믿으나 마나다. 진심이 없는 친구는 사귀나 마나다. 마찬가지로 자기희생 없는 사랑은 하나마나다.

딸들을 보며 느낀다. 그들이 아무리 사랑을 거부하여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딸들을 짝사랑하는 것은 운명이다.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멈출 수 없다. 멈춘다면 결국 나 자신 삶의 원동력까지 잃어버릴 것이다.

문득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의 짝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숨 쉴 수 있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어머니들은 모두 다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어머니의 짝사랑이 그렇게 간단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의 사랑에는 희생이 배어있다. 어머니의 꿈이 서려있고, 소망이 담겨있다. 어머니의 인생이, 삶이 살아 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사랑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가볍게 여겼다. 얼마나 무지한 소행이란 말인가?

밤마다 딸들을 기다리는 내 모습을 보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상처받았을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한다.

다시 짝사랑이다. 사랑은 양지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음지도 볼 줄 알게 되면 짝사랑의 아픔은 반으로 줄어 들 수 있다. 딸들의 입장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딸들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들의 인생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입장에서 보아주어야 한다. 밤늦게까지 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짝사랑으로 인해 받게 되는 아픔을 많이 줄일 수 있다. 그런데 그 것이 생각처럼 쉽진 않다. 걱정이 앞서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나 자신의 가슴에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겠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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