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25 - 3.1 운동, 그 발자취를 따라서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3?1절을 전후해 만세 운동의 중심지가 됐던 서울 중심을 돌아봤습니다.


# 아직도 3.1 운동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은 탑골공원 전경


‘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역대 왕들의 이름은 줄줄이 외워도 정작 궁궐 문턱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다. 교과서에 나온 기미독립선언문의 행간 의미까지 꿰차고 있는 학생들 중에서도 막상 독립선언문이 낭독됐고 피 흘려 일제 순사와 싸웠던 역사 현장에 대해선 무심하기 일쑤다. 대한민국 내에서 이뤄지는 역사 교육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강추위가 계속됐던 겨울이 지나고 봄바람이 시작되는 3월이 왔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만세 소리와 민족혼이 가득했던 3.1 운동 유적지를 돌아보기 좋은 때다. 1919년 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진행됐지만 서울 도심은 그 가장 중심지였으며 일제의 탄압 또한 강도 높게 진행됐던 곳이다.


# 삼일문

최초의 근대 공원

3.1 만세 운동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은 크게 종로에서 시작해 보신각과 광화문, 덕수궁 앞을 거쳐 한국은행 앞에서 마무리하면 적당하다. 멀게만 느껴지지만 3시간 안팎이면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거리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자녀들과 함께라면 탑골공원과 태화원 자리, 천도교 교당, 조계사 인근을 돌아보는 데 그쳐도 괜찮다.
종로 3가와 2가 경계에 있는 탑골공원(사적 제354호)은 그 출발점으로 삼기에 가장 좋다. 탑골공원은 1919년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 만세운동의 발상지다.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이며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 손병희 선생 동상

탑골공원은 대한제국의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1897년 공원으로 조성했다. 원각사 탑이 있다 해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으며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이라 할 수 있다. 1984년 주변 건물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편입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으며 1992년 5월 28일 탑골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 때 노인들의 휴식터로 인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내부를 정비해 평일엔 비교적 한적한 분위기다.
탑골 공원의 원주인은 원각사였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흥복사의 옛터에 1465년(세조 11) 중건된 사찰로 조계종 본사로 운영됐다. 현재 남아있는 10층 석탑은 1467년(세조 13) 4월에, 원각사비는 1471년(성종 2년에 건립됐다.
연산군에 의해 1504년 폐사됐으며 1514년(중종 9) 사찰이 철거됐고 이후 빈터로 남아오던 것을 현재 사적으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팔각정

비폭력,평화 운동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을 들어서면 손병희 선생 동상과 3.1 독립선언기념탑, 그리고 팔각정이 과거의 기억을 일군다.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호는 의암이며 3.1 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필두로서 조선 독립은 선언한 인물이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1980년 4월 15일 세워졌다. 3.1 독립선언서는 전문 1762자로 구성됐으며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의 전개방법을 담고 있어 전세계 독립선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 3.1 독립선언 기념탑

공원의 중심에 자리잡은 팔각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3호)은 1897년 원각사 옛터를 만들면서 세운 정자다. 대한제국 황실의 음악연주소로 사용됐다고 한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이 곳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공원 동쪽엔 만해 한용운 선사비가 세워져 있다. 한용운 선생은 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당시 불교계를 대표해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공원 한편엔 3.1정신 찬양비와 3.1운동 기념부조가 세워져 있어 당시의 상황과 시대 정신을 전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공원 내엔 국보 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보물 3호 대원각사비, 그리고 양부일구(조선 초기 해시계) 받침돌이 있어 1석2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 원각사지 10층 석탑


# 대원각사비

이완용 소유였던 ‘태화관’ 자리

공원에서 광화문과 청와대 방향을 향하면 멀리 태화빌딩이 보이는데 이 곳이 바로 태화관이 있던 자리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로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인 명월관의 별관이었다. 남감리교회 재단에 인수되면서 헐려 현재는 현대식 빌딩이 들어서 있다.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순화궁이 있던 자리기도 하며 일제 강점기엔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완용이 갖고 있던 1918년 벼락이 떨어져 이 집에 있던 고목이 둘로 갈라져 넘어지자 이에 놀라 명월관 주인에게 팔았다고 한다. 이 때부터 명월관 별관으로 사용했다.




# 태화관이 있던 태화빌딩 자리

2층 건물인 태화관은 크고 작은 방이 많아 서울의 부호와 조선총독부 관리 등 친일파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명소기도 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이 곳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일본 경찰에 연행됐다.
태화빌딩에서 인사동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만세운동의 한 축이었던 천도교당이 보인다. 독립운동가들은 이 곳에서 선언문을 검토했으며 교당 앞에서 배부했다고 한다. 다시 종로 쪽 큰 길로 나오면 YMCA(기독청년회관) 건물을 찾을 수 있다.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3?1운동을 준비했던 곳이다.


# 독립선언문을 검토, 배부했던 천도교당


# YMCA 건물. 3.1 운동을 준비했던 곳이다.


#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인쇄한 ‘보성사 터’ 기념 조형물.

YMCA 회관을 지나 만나는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조계사가 나온다. 사찰 뒤편에 작은 공원이 보이는데 이 곳이 바로 ‘보성사 터’였다. 보성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곳이며 조선독립신문도 이 곳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졌다.
3.1 만세운동의 행렬은 일제 순사들의 저지를 뚫고 보신각 앞과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으로까지 이어졌다. 현재의 서소문과 정동 일대쪽으로도 민중들의 함성이 거셌다. 하지만 일제의 무력에 맨몸으로 시위하던 군중을 조금씩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엔 수탈의 표상이던 한국은행 앞 표지석엔 다음과 같은 안타까운 내용이 적혀 있다.



# 만세운동이 드높았던 보신각 앞과 대한문 앞


# 한국은행 앞 충돌로 부상자가 200명이나 속출했다고 한다.

‘당시 시위대가 일제 헌병경찰들과 격돌해 200여명의 부상자를 낸 곳.’
그렇게 남대문으로 밀려나며 쓰러지는 가운데서도 민중들의 함성은 끊이지 않았으리라. 3월 봄바람이 함께 그 때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뜨거운 만세 소리를 되새겨보자.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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