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산사에서

금당사

마이산 하면 누구나 탑사를 먼저 떠올린다. 정성들여 쌓아올린 탑사의 위용 앞에서 기원하곤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탑사에 가기 전 찾는 절이 생겼다. 이름 하여 금당사다. 금당사는 글자 그대로 금으로 된 절이다. 그래서인지 사찰이 온통 금빛이다. 지붕은 말할 것도 없고 기둥에 이르기까지 찬란하게 금빛으로 빛이 난다. 금을 좋아하는 사람의 욕심을 닮은 것 같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절이다.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소속되어 있는 금당사의 유래를 읽어 보았다. 백제 시대에 최초로 창건된 아주 오래된 사찰이다. 중간에 소실되었었고, 이갑용 처사에 의해 세워진 탑사가 유명세를 탐으로서 그 빛이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어찌 되었건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 참 좋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으면서 활기가 넘쳐났다.

금당사의 금빛 지붕, 처음에는 놀라웠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번 보고 세 번 보게 되니, 생각이 달라졌다. 찬란하였던 금빛에 대한 생각도 무디어졌다. 처음에는 금빛이어서 놀랐는데, 횟수가 많아짐에 달라졌다. 욕심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면서 그것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는 것처럼 황금에 대한 생각 역시 달라진다. 욕심 또한 세월과 함께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평생을 살아가면서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그러나 기회는 잡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기회로 작용할 뿐이다.



황금으로 지붕을 하였다 한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금빛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을지라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기회가 눈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할지라도 잡을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기회가 아니다.



문득 걸어온 삶을 되돌아본다. 그동안 눈앞의 황금을 쫓아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반성해본다. 욕심으로 바라보면 불나비와 같다. 금방이라도 손에 넣을 것 같아 날뛰었다. 그러나 그것은 잡을 수 없는 기회였을 뿐이었다. 나에게는 소용없는 것인 줄도 모르고 방방 날뛴 불나비와 같았다. 어리석은 중생의 슬픈 자화상일 뿐이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기회란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무리 기회가 많이 온다고 하여도 그것을 잡을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나에게 기회가 아니다. 아등바등한다고 하여 모두에게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지혜다. 금당사의 금빛 지붕을 바라보면서 나를 들여다보았다.

기원하는 마음 (기원)

노거수에 제단이 놓여 있다. 제단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동전들이 쌓여 있다. 동전 하나하나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원하는 지극한 마음이 말이다. 제단에 동전을 놓은 뒤 기도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이 아직은 살만하고 따뜻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건 아닐까? 오직 한 마음으로 절실하게 바라는 마음이 넘쳐나기 때문에 세상은 따뜻해진다.

우리는 옛날부터 거대한 것을 숭배해 왔다. 고인돌이 그 증거다. 거석문화라고 일컫는 큰 것에 대한 경외심은 컸다. 바위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나무도 그랬고 웅장하게 흘러가는 강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마을마다 당산나무가 있어서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으면서 살아온 민족이 바로 우리다. 그러니 노거수와 조우하면 우선 고개를 숙이는 태도가 배어 있었다.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의 시작이기도 하다.



제단이 놓인 노거수는 내소사 안에 있다. 오래된 산사에 서 있는 나무여서 더욱 더 신령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사의 무언의 힘과 더해져 더 오묘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무를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나무가 살아온 날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나무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무를 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애증이 겹쳐졌을 것이다. 내면의 슬픔을 안으로 승화시켰을 수도 있고, 그것을 차아내지 못하고 폭발하였을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소화해내지 못하여 광기로 발산할 수도 있고 안으로 삭여 열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연록의 노거수를 보면서 사람들의 기원과 정성을 본다. 사람들의 진정성과 절실함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그런 마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넘치는 세상은 아름답다. 살맛이 나고 신바람을 낼 수 있다. 기도하는 마음은 바로 위하는 마음이다. 무엇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모여서 이루어진 세상이라면 더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그것만으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나무를 보며 내 안을 들여다본다. 기도하는 마음만을 모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기도의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설사 나를 위한 기도라 하여도 그것은 나쁘지 않다. 뭔가 이루기를 바라고 뭔가 성취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나무가 푸르다.

물레방아 사랑 

물레방아가 돈다. 연등이 걸려 있는 길가의 물레방아가 돈다.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따라 사랑도 돈다. 시간도, 세상도, 우주도 돌아간다. 돌아가는 세월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저 물레방아, 사랑을 생각하고 인생을 생각한다.

인생은 덧없다. 지천명의 나이를 지나 이제 이순을 코앞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더 길어진 시점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덧없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날들이지만 10년, 20년, 30년 세월을 훌쩍 건너 뛴 것처럼 느껴진다. 눈 한번 깜박인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속절없이 멀어진 지난날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허망하다. 바람 같은 인생 속에 몸부림쳐온 나날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당시에는 그렇게 간절하고 절실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님이 없다면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았다. 이별은 우주의 종말처럼 생각되었다. 에이는 아픔을 갈무리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였다. 그래도 시간은 갔고 흘러가는 세월 따라 아픈 이별의 상처도 마무리되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였던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새로운 사랑은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나곤 하였다.

그랬다. 사랑은 한번만이 아니었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랑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살며시 다가왔다. 아무도 몰래 살짝 다가와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별이 아파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을 해봤지만, 다가온 사랑 앞에서는 무력하게 무너지곤 하였다. 사랑은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찾아온 사랑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준비된 상태에서 사랑을 수용해야만 하였다.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사랑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고 사랑에 빠져들었다. 사랑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이었다.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욱 더 빠져 들어가는 것이 사랑이요, 사랑의 속성이었다.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속성이 있다. 원 없이 타고나면 남는 것이 없다. 사랑의 끝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사랑을 하고 나서 가지게 되는 깨달음이다. 사랑은 활활 타버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후회 없이 해야 한다. 어차피 남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한 줌의 재도 남지 않도록 불태워야 할 일이다. 그것이 현명하다.

물레방아를 보며 돌아가는 세월을 생각한다. 무심하게 돌아가는 세월 속에서 사랑을 생각한다. 사랑은 인생을 풍요롭게 해준다. 사랑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다.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연이다. 그렇다면 멋진 사랑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사랑은 인생을 아름답게 한다. 사랑을 통해 인생을 빛내자.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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