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29 -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렀던 심우당을 찾아가봤습니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성북동 ‘심우장’


현대적인 부와 옛스러움이 공존하는 성북동엔 소중한 문화 유산과 볼거리가 듬뿍하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이 팽창하면서 내노라 하는 인물들이 모였던 곳도, 근대화의 돌망치와 삽질 소리가 먼저 괴성을 내뿜은 곳도 바로 성북동 산자락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화장과 돈암장, 장면 전 총리의 저택 등 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도 모두 이 인근에 모여있다. 성북동 가장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해선 서울 대학로와 삼선교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각각 있다. 어느 곳을 택하든 서울성곽이 이어지는 곳에서 만나게 돼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여유있게 걸으며 숨어있는 보물들을 찾는 게 나을 듯 싶다.


# ‘심우장’의 현판은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썼다.

‘옥고’ 등 고달팠던 삶

삼선교에서 성북동길을 따라 삼청터널 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 중 백미다.
옛 최순우 선생 저택을 비롯 조선시대 왕비가 제를 지냈던 선잠단, 길상사 길목 등을 거치게 된다. 5월과 10월, 일년에 두 번만 문을 여는 간송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리고 차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최고 부자들만 모여 산다는 요즘 성북동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길목 중 하나에서 ‘심우장’이라고 쓰인 허름한 간판을 만나게 된다.
산동네 이미지의 골목길과 낡은 철문, 정겨운 담장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는다. 그리고 그 길 가운데 쯤 역시 평범한 대문을 가진 ‘심우장’(서울기념물 제7호)이 있다.

# ‘심우장’의 복도 모습


# 부엌


# 평범한 골목길에 위치한 ‘심우장’. 대문 뒤로 보이는 건물은 관리사다.


심우장은 한국 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에 머물던 집이다.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경교장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화장 위치를 생각하면 한용운 선생답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를 보는 것도 꺼려했던 만해라 집 방향도 등을 돌린 것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만해 선생이 이 곳에 터를 잡을 때만 해도 이 곳은 한적한 동네였다.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른 만해 선생이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자 승려 벽산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했던 땅 52평을 내어주고 몇몇 유지들이 도와 ‘심우장’을 지었다

손수 심은 ‘향나무’

한용운 선생(1879-1944)은 일제시대 끝무렵인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이 곳에서 지냈다.
보통 남향이나 동향으로 집터를 잡기 마련이지만 만해 선생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는 것을 피해 불편한 북향을 택했다고 한다. 시종일관 일제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실천했던 만해 선생은 그토록 고대하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 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가면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 ‘심우장’과 양옥의 관리사가 있다.




# 만해 한용운의 초상화와 그가 심었다는 향나무

‘심우장’이란 명칭은 승려였던 그의 위치와 관계가 깊다. 선종에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했다. 그의 일생이 그랬던 것처럼 ‘늘 공부하는 집’이란 의미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쓴 것이다.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 지붕을 올렸다. 전체 5칸에 불과한 ‘ㄴ’자형 작은 집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부엌이 위치해 있다. 부엌 뒤론 식사 준비를 하던 찬마루방이 있다.
한용운 선생이 쓰던 방엔 그의 글씨와 각종 저서, 논문집과 옥중공판기록 등이 전시돼 있다. 만해가 죽은 뒤 외동딸 한영숙씨가 살다 일본 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으로 오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이후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됐다.
만해 생전만 해도 소나무숲으로 울창했던 이 곳에서 그는 매우 한적하고 청빈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원엔 많은 화초를 심어 감상했고, 한쪽엔 그의 기상을 닮은 향나무를 손수 심었다.






# 심우장 가는길

기다리던 ‘다른 세상’

심우장에서 만해는 유마경 원고 번역을 비롯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으며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들을 너그럽게 맞았다고 한다.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에겐 “조금도 실망하지 말게. 우주 만유에는 무상의 법칙이 있고 절대 진리는 순환하니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네”라며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본분을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세상이 올 것일세”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일제 시기 대표적인 민족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조선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승려였다. 동시에 ‘님의 침묵’ 등 근대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예스러운 골목길, 향나무를 바라보며 민족독립을 고대했을 그의 자취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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