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진단 연속인터뷰>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1

한국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특히 국가보안법 사범 증가, 노동 탄압 등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사회적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신공안정국’으로 일컬어지는 공안통치에서 파생된 숱한 문제들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위클리서울>은 2007년부터 국가보안법, 남북관계, 노동 인권, 생태 환경 등의 문제 개선을 위해 각계 인사들과 연속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그동안 송두율 교수, ‘야생초 편지’의 황대권 씨, 재야인사 김낙중 선생, 이소선 여사,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김상봉 전남대 교수,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송환’의 김동원 감독, 김세균 서울대 교수, 강기갑 민노당 대표, 노회찬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 정세현 이종석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우종 덕성여대 명예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 ‘민족일보’ 조용준 선생, 박원순 변호사, 장석춘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박노자 오슬로대학 교수, 정지영 감독, 이상돈 중앙대 교수, 손호철 서강대 교수, 이해영 한신대 교수,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고유환 동국대 교수,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고은 시인, 이한열 열사 모친 배은심 여사, 박창근 관동대 교수, 배우 최종원 문성근 권해효 씨,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김용택 시인, 지율스님, 박인배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장, 강정구 교수,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 이이화 교수, 박재동 화백, 문정인 연세대 교수, 김이경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사무총장,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 손혁재 한국NGO학회 회장,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박경석 장애인철폐연대 대표, 가수 안치환 씨, 김두관 경남도지사, 안종주 박사, 김정헌 공주대 명예교수, 이근행 전 MBC노조 위원장,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김정수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 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서정민 한국외대 교수, 김태동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이진석 서울의대 교수,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이호철 작가 등 180여 명의 사회 각계 인사들과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이번호에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단국대 석좌교수, 1대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전 국회의원)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다산(茶山) 정약용. 18세기 조선실학을 집대성한 거두다. 다산연구소는 조선시대 실학자인 다산의 개혁정신을 오늘날의 시대정신으로 해석하는데 매진하고 있다. 다산은 일찍이 “온 세상이 썩은 지 오래다. 부패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고 개탄했다. 다산의 탄식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박석무 이사장은 조선의 이 거대한 사상가의 이야기를 결코 어렵거나 복잡한 방법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순들을 다산의 사상을 통해 반성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민주주의의가 도래하면서 다산의 논리들이 새롭게 부각되진 않을 수도 있다. 만민평등, 선거를 통한 정치체제의 구축 등을 두고 굳이 다산을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겉보기엔 그렇다. 그만큼 변화해왔다. 다만 200년 전 다산의 사상을 참고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참고와 해석을 통해 참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산의 사상을 참고하고 해석할수록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폐해는 그 속살을 드러낸다. 그 사상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면 낼수록 박 이사장의 탄식도 깊어만 갔다.

“한국은 부정부패 공화국 아닌가. 정치인들, 고급공무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뇌물과 관련되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스폰서 검사로 국민들은 분노했다. 또한 현재 우리사회는 신분 문제는 완전히 타파하지 못했다. 다산은 당시 함경도, 평안도는 왜 인재등용을 안 하냐고 따졌다. 그런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영호남 지역문제가 있다. 이처럼 아직 실현되지 못한 부분이 많다.”

박 이사장은 다산의 사상 중 정치나 행정을 이끌어 가는 공직자들이 청렴해야 한다는 대목을 으뜸으로 꼽았다.

“공직자가 부패하게 되면 절대 제대로 된 사회가 될 수 없다. 이는 앞으로 우리사회, 나아가 인류가 염두에 두고 가야 할 사안이다. 이 문제는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부패한 사회, 부패한 나라를 어떻게 청소해서 깨끗하고 정직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집념이 우리에겐 굉장히 중요하다.”

해법은 다산에서 찾아야 한다. 박 이사장은 “다산에게 답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다산은 목민심서를 통해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 나열한다. 새롭게 연구해야한다”며 “다산은 당시 요순시대를 만들고자 했다. 지금 우리가 일류국가가 되려면 여전히 다산이 필요하고 다산의 생각에 천착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다산은 학자이면서도 행동가였지만, 개혁엔 실패했다. 조선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행동이 파격이라면 파격이랄까, 지금에 와서 다산의 사상을 두고 굳이 ‘파격’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는 없을 법하다. 그의 사상엔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덕목들이 녹아들어 있다.

다산의 상식과 교양으로 대한민국을 바꾸고자 함은 조선을 행동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파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소박한 과제이다. 소박한 과제임에도 현대인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까닭은, 관철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불행하게도 그 답은 다산에게 없다. 현대인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일지도 모른다.

중앙일보 사옥 안에 있는 다산연구소를 찾아 박석무 이사장과 마주했다. 다산에 관해선 비록 원론적인 논의에 그쳤으나, 다산 그리고 박 이사장이 우리사회에 던지는 화두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 다산은 어떤 인물인가.

▲ 널리 알려져 있듯 조선 후기 실학자다. 많은 실학자 중에서도 실학이라는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다. 흔히 말하는 ‘유용지학’은 우리가 말하는 실학이다. 이를 통해 국민민복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익, 박지원 등 많은 실학자들의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창의적인 체계를 세웠다. 당시 침체된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혁명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학문 범위도 특정 학문에 한정되지 않고, 백과전서(과학, 예술, 기술 등을 부문별로 배열해 만든 지식의 총체물)적인 학자로 거의 모든 학문을 연구했다. 그 연구 결과가 분야마다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학문에 이르게 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 의학, 지리학, 역사학, 정치․경제․법률 등 다분야에 능통했다.

- 시대 상황상 다산사상의 바탕은 유교에 있지 않았나.

▲ 우리가 흔히 유교에서 철학이라 하면 주로 성리학(인간의 성품, 우주와 인간의 관계, 삶의 근원적 원리를 풀어보려는 학문)을 말한다. 다산은 성리학 하나에 집착하거나 매몰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당시 관행으로 여겨졌던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

성리학의 근원은 공맹학이다. 성리학적 논리에 집착하기 보단 오히려 공자와 맹자의 본원적인 유교로 돌아가, 그 유교를 통해서 당시 사회를 구제하고 백성들의 가난과 사회적 질곡을 해결해보려는 의도를 가졌다. 현실적으로 국민이나 나라에 유용하지 않는 학문은 학문으로서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동양의 유학에만 매몰돼 있는 많은 학자들에 비해 열린 사고를 펼쳤다. 서구의 논리에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고 했다. 서양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에 첨가해 좋은 논리로 전개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조선이 다산의 정책이론들을 받아들여 많은 부분에 개혁하고 기계문명을 발전시켰다면, 벌써 일본보다 먼저 근대화 됐을 수도 있다고 판단해본다. 물론 역사엔 가정이 없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했나.

▲ 당시 조선은 농업 국가로, 경제는 토지정책으로 지탱됐다. 농지를 어떻게 소유해야만 국가에도 유리하고 국민에게도 유리한지 고민했다. 많은 농민들은 대부분 농지를 소유하지 못했다. 소수 부자만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 토지제도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진 않고는 국가에게도 이익이 안 되고 국민에게도 이익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토지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논리를 전개했다.

일례로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해야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상황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게 경제적 평등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겼다.

신분, 계급의 문제도 언급했다. 적자는 과거시험에 응할 수 있었지만, 서자는 과거시험도 못 치렀고 고관, 대관에 이를 수도 없었다. 다산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고 역설하며, 당시 귀족과 평민의 구별을 비판했다. 구별 짓게 되면 훌륭한 인재를 발굴할 수도 없다. 적서 구별 없이, 지역구별 없이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강력히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부국강병설도 제시했다.

▲ 나라의 부를 축적하지 않으면, 부국강병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선비들이 천시했던 기술문제를 제기했다. 기술을 개발해야만 좋은 제품이 나오고, 좋은 제품이 나와야만 국가나 국민이 이롭게 살 수 있다고 했다. 병기를 개발해야만 강한군대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기술개발에서 비롯된다. 기중기, 거중기를 개발해 경비도 절약하고 공비도 단축해서 할 수 있었다.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과학적인 기구를 발명해 실제 활용했다. <위의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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