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윈 말 타고 전국 누볐던 ‘임금의 형’
여윈 말 타고 전국 누볐던 ‘임금의 형’
  • 승인 2011.07.1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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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역사 현장 탐방 32 - 청권사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선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과 그의 부인 해주 정씨를 합장한 청권사를 둘러봤습니다.


# 효령대군 묘역에서 바라본 도심. 현대인들의 세태를 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 # 정면에서 본 효령대군 묘역


동생은 살아서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고 형은 부처님을 모셨다.
우리나라 최대의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대왕은 자신뿐만 아니라 양령대군과 효령대군의 일화로도 얘깃거리가 많은 군주다. 특히 태종의 둘째 왕자이자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1396~1486, 이름 보)은 훗날 불교에 귀의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청권사는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서울 강남 도심의 방배동에 위치하고 있다. 효령대군과 그의 부인 해주 정씨를 합장한 묘소가 있고 이를 기리는 사당과 신도비, 재실(모련재), 비각 등으로 꾸며져 있다.





# 효령대군의 신주를 모신 청권사. 평상시엔 정문이 닫혀있다.





# 재실인 모련재와 신도비

우애 깊었던 ‘형제들’

아파트와 빌딩으로 둘러싸인 청권사의 녹지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사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효령대군이 불교에 몸을 담긴 했지만 그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412년(태종 12) 대군으로 봉해진 효령대군은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엔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했고 온화 문명했으며 효제충신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높게 평가했다.


# 긴 시간에 걸친 훼손을 막기 위해 묘표석은 따로 보존되고 있다.


조선개국초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숭유억불정책’이 극심하던 때였다. 하지만 효령대군은 백성들의 민심을 ‘유불조화론’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들의 자치규범인 ‘향헌 56조’를 제정해 자율적인 의식교화 실천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효에 대한 이론 정립과 착한 일을 권장하는 데에도 앞장서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를 사경했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장수인 90세까지 산 효령대군은 태조 이성계부터 9개 성종 대왕에 이르기까지 9명의 왕을 모셨다. 왕자로선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부귀를 저버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왕위를 양보한 효령대군은 항상 검소한 옷차림에 여윈 말을 타고 자연을 벗삼아 전국의 큰 절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거주 역시 초가집에서 소탈한 생활을 했다. 한번은 효령대군이 병이 들었다 완쾌되자 세종대왕이 이를 크게 기뻐해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이 때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정겨운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우애가 두터웠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첫째인 양녕대군은 뒷날 “내 복이 많아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불자)의 형이 될 것이니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뿌듯해했다고 한다.






# 청권사 정문 풍경

영조와 정조의 ‘정성’

불가에 귀의했지만 효령대군이 당시 가졌던 위상은 현재 남아있는 국보급 문화재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군은 우리나라 국보 제2호인 탑골공원 10층석탑과 보물 제2호 ‘보신각종(원각사종)’을 직접 감독해 만들었다고 한다. 문장에도 뛰어나 <원각경> 등의 번역을 비롯 불교 발전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이처럼 왕실의 큰 어른으로 존경을 받으며 천수를 산 효령대군은 1486년(성종 17)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이 곳에 예장됐다. 1865년 고종 2년엔 종묘 공신당의 세종 묘정에 배향됐다. 시호인 ‘정효’는 너그럽게 즐기며 오래 살고 지극 정성으로 부모를 잘 섬겼다는 의미다. 슬하엔 7남 2녀를 남겼는데 손자와 증손자가 각각 33명, 110명이었다.
청권사의 이름인 ‘청권’은 ‘신중청 폐중권(身中淸 廢中權)’의 준말이다. 고대 중군 주나라 때 태왕이 큰아들 태백과 둘째 아들 우중을 뒤로하고 셋째 아들인 계력에게 양위하려고 하자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미리 알고 형만이란 곳으로 가 머리를 깎고 은거했다.
훗날 공자가 이를 높이 평가한 말이 논어에 담겨 있다.
공자는 이에 대해 ‘태백은 그 덕이 지극했다. 우중은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했으나 내면적 처신은 깨끗했고 의식적으로 몸을 함부로 한 것은 권도에 부합했다’고 평했다. 훗날 세종대왕이 된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효령대군의 행적을 우중에 비유해 ‘청권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판 이름은 영조대왕이 지어줬다고 한다.
여기서 ‘청도’란 목적을 위한 내면적 처신이 깨끗하단 뜻이고 권도는 지상의 위대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 일반적인 예의와 법도를 크게 초월한 행위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청권사는 효령대군과 예성부부인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1736년 영조 12년 왕명으로 경기감영에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맞배지붕의 형태로 현판은 정조가 내렸다.








대군 묘역의 전형

청권사 내 효령대군 묘역은 1972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이후 1980년에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1984년~1986년 문화재보호구역 정비공사가 진행되면서 묘역을 새로 정비할 때 일부 옛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묘역은 신도비와 구 묘표 2기, 장명등, 문인석 2쌍이 남아 있어 조선 초기 대군 묘역의 규모와 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래 묘표석은 묘소에 세워져 있었지만 긴 세월 바람에 훼손되며 보존이 어렵게 되자 비각을 따로 지어 옮겼다.
1만3000여평에 이르는 청권사 경내엔 소나무와 잣나무, 주목 등 다양한 수목과 꽃나무가 가득해 자연을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 효령대군 묘역에서 바라본 도심 속 풍경도 빼놓지 말자.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불교에 귀의한 대군은 오늘날 세대를 바라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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