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33 - 사육신묘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선 조선조 충신들의 넋이 서린 사육신묘를 둘러봤습니다.




#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종에 맞서 ‘단종 복위’를 꿈꿨던
사육신들의 묘소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 함석헌 선생 <씨알의 소리> 중에서 -





지조와 절개가 없는 시대라고 한다. 일제시대 친일파들에게도 이런 저런 이유로 면죄부를 주는 사람들도 있다. 생계형이라는 부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친일 행위는 친일 행위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혹은 다른 분야에서 업적이 있다 하더라도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빌붙은 사람들의 행태가 ‘미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도 행위에 대한 시시비비는 분명히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소위 식자층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나 권력층에 있던 이들이라면 그 책임은 더욱 크다. 당사자가 살았던 때와 먼 훗날 역사의 평가는 그래서 다를 수밖에 없다. 인생의 패자와 승자 역시 마찬가지다.




# 거사가 발각된 이후 사육신 일가들은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몰살당한 ‘충신 가문’

현실에선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죽은 뒤 그 이름을 더욱 높이 평가받은 위인들이 적지 않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위치한 ‘사육신 묘’도 역사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며 돌아보기에 적격인 곳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된 사육신묘는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사육신의 목숨을 바친 여섯명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는 곳이다. 조선 세조 2년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묘소와 사당이 있다.
이들은 단종 3년(1455)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분개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사육신들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했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면서 실패했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자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이 세종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해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가 아닌 ‘나리’라 불렀다고 한다.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단근질(불에 달군 철로 살을 태우는 고문형)로 죽음을 당했고 하위지는 참살됐다. 유성원은 잡히기 전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했고 김문기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했다.
이 외에도 사육신 가족 중 남자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여자들은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두 화를 입었다.




# 사육신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진 ‘불이문’

매년 10월 9일 ‘추모제’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 이 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엔 그 뜻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웠다. 1955년 사육신비를 세웠으며 이후 묘역을 확장해 현재는 공원으로 인근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원래 묘역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묘도 만들어 함께 모셨다. 1978년 서울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3000여평이었던 묘역을 9000여 평으로 확장했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와 불이문, 홍살문, 비각 등도 새로 지었다. 매년 10월 9일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향을 올린다.




#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와 사육신비


사육신묘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있는 데엔 사연이 있다. 어느 스님이 성승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생육신의 한명인 김시습설과 성삼문의 상위 박임경설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엔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박팽년 성승 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인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엔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렀다. 그러다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를 새로이 만들어 7기가 됐다. 의절사 내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뒤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 박팽년 유응부 이개 유성원 성삼문 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이 중 하위지와 박팽년 후손만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뜨거운 7월의 여름 태양 아래서 ‘둘이 아니다’는 의미의 ‘불이문’과 ‘의절사’의 위패를 보며 오늘날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사육신 인근의 수많은 고시학원들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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