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35 - 아차산성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선 삼국시대 뜨거운 쟁탈전을 펼쳤던 아차산성을 둘러봤습니다.


# 아차산에 새롭게 세워진 고구려정.
이 곳에서 기운이 가장 왕성한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광대한 서울의 동쪽 지역에 불과하지만 삼국시대엔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치열했다.
‘아차산성’은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1973년 사적 제234호로 지정됐으며 지정면적은 10만 3375㎡에 달한다. 아차산은 해발 200미터 정도의 낮은 산이지만 한강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다.
아차산성은 아단성, 장한성, 광장성으로 불렸다.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해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싸고 전체 둘레 약 1000미터의 성벽이 구축돼 있다. 동쪽과 서쪽, 남쪽엔 성문지가 남아 있다.
성안에 작은 계곡도 포함하고 있을 만큼 당시로선 규모가 매우 컸다. 성벽 구조는 대적인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돌아가며 낮은 석루를 쌓았다. 지금은 성벽들이 무너져 흙과 돌이 섞인 모습이다. 성벽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 되며 내부에선 1~2미터다.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서울성곽이나 남한산성 등의 웅장한 모습을 떠 올리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 남한 최초로 고구려식 단청을 재현했다고 한다.


# 고구려정 천정의 사신도


# 고구려정에서 내려다본 한강

‘백제 초기’의 요충지

삼국시대 수많은 군사들의 피와 땀이 깃들인 만큼 역사적인 사건도 많이 일어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75년 백제 개로왕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한 3만여명의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키고 이 산성 밑에서 싸우다 잡혀 살해됐다고 한다. 이후 백제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했다.
널리 알려진 온달 장군도 이 곳과 깊은 인연이 있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였던 온달 장군은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만큼 삼국 모두가 기를 쓰고 차지하려고 했던 곳이었다.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아차산성은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차지가 됐다.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전장터였다.
산성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286년에 중수했다고 하니 이보다 이전으로 추측된다.




# 아차산성의 흔적. 3세기 중수했다고 하니 축조 역사는
그보다 더 이전으로 추측된다.



1998년과 1999년에 실시된 1차 발굴에서 구리시 지역의 아차산 보루성 유적이 발견됐고 2차 발굴에선 광진구 지역의 아차산성이 발굴됐다. 처음 발견된 보루성에선 고구려 성벽과 건물터, 온돌자리와 집수장 등이 확인됐으며 상당량의 철기와 토기도 수습됐다. 아차산성 2차 발굴 땐 고구려 성벽과 건물터, 연못터가 확인됐다.


#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

“기가 가장 왕성한 곳”

아차산 초입에 조성된 생태공원도 최근 들어 각광받고 있다. 화장실 건물에 새겨진 고구려 고분의 수렵도가 이색적이다. 가족들과 자연을 즐기며 산책하기 좋다.
유서 깊은 아차산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또 다른 곳은 산 밑에 위치한 ‘영화사’다. 지금은 인근 주택과 가까이 있어 깊은 산중의 산사만큼 고즈넉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평일에도 불자들이 자주 찾는 의미 있는 장소다.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정겹다.
아차산 영화사는 약 1300여년 전인 서기 672년(신라 31대 문무왕 12년) 명승이었던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처음엔 용마산 용마봉 아래 세워졌는데 ‘화양사’로 불렸다. 1395년 조선 태조는 이 절의 등불이 궁성에까지 비친다고 해 용마산 군자봉으로 옮겨짓게 했다. 그러다 190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현재의 사찰 모습을 갖춘 것은 1997년으로 현재 건물들의 역사는 길지 않다. 특히 미륵불전은 입시나 병 치료를 기원하는 사람들로 발걸음이 끊이지 않을 만큼 유명하다.









#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영화사. 지금 남아있는 건물들은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용마산-망우공원’ 등산로 

영화사 위쪽길을 따라 아차산을 올라가다보면 새롭게 지어진 고구려정자(고구려정)가 보인다.
예전 팔각정이 있던 자리다. 1984년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어진 팔각정은 수려한 조망과 경관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노후로 인해 기울어지면서 2008년 초 철거됐다. 이후 고대사 연구자들의 철저한 고증과 자문을 받아 이 자리에 지금의 고구려정을 지었다.




# 생태공원. 화장실 벽의 수렵도가 인상적이다.

고구려정의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불룩한 고구려 배흘림식으로 자재는 300년 이상 뒤틀리거나 변하지 않는 금강송을 사용했다. 기와는 고구려 궁궐인 평양 안학궁터와 아차산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색 문양과 색상을 참고했다.
또 정자의 단청 문양은 쌍영총과 강서중묘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표현된 문양을 남한 최초로 재현했다. 광진구에 따르면 이 자리는 아차산에서도 가장 기가 왕성한 자리임이 확인됐다고 한다.


# 아차산 입구

이처럼 역사적 가치를 지닌 아차산성 인근은 서울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등산로이기도 하다. 아차산 코스가 다소 짧게 느껴진다면 서울시 북쪽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용마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망자들의 안식처이자 ‘사색의 길’로 유명한 망우공원도 곧바로 연결돼 있다. 아차산에서 망우공원까지 이르는 등산로는 여유 있게 돌면 하루 코스로 적합하다.
무더운 여름철, 휴가 기간에도 멀리 떠나기 어렵다면 역사여행과 산행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아차산으로 떠나는 건 어떨까.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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