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 서울로 가는 전봉준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승인 2011.10.05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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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위 사진은 ‘압송되는 전봉준 장군` 이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전봉준 장군의 유일한 사진입니다. 한때 러시아 선교사가 촬영한 것이라는 말도 있었고 프랑스 신부가 촬영한 것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제목으로 이때의 상황을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중략)”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언제 누가 촬영했을까요? 이 시의 제목 <서울로 가는 전봉준> 에서 암시하듯 전봉준 장군을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에 촬영된 장면이라면 1894년 12월 2일 순창 쌍치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나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경조일신문> 1895년 3월 12일자 기사에 “이미 법무아문의 심판에 회부된다면 사형을 면치 못할 것임으로 그 용모만이라도 촬영하여 두고 싶다는 사진사의 청에 의해서 촬영이 허가되었다"는 내용이 있고, <대판매일신문>에 사진의 구도나 인물묘사가 거의 같은 삽화가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장면을 일본인 사진사와 화가가 특별히 사진을 찍고 스케치하기 위하여 연출한 장면으로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5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그 중 가운데 가마를 타고 형형한 눈빛으로 너무도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전봉준입니다. 그의 눈을 보면 앞에 가마를 맨 사람의 눈과는 정말 많은 차이가 나는걸 느낄 수 있습니다. 가마를 맨 사람은 왠지 무언가에 눌린 듯한 눈빛이지요. 물론 사진기를 처음 대하는 사람의 어리둥절한 표정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볼 때는 주체적으로 역사를 만들어 나가지 못하는 그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응하는 또 다른 조선 민중의 두렵고 슬픈 눈빛으로만 보입니다.
거기에 비해 전봉준의 눈빛을 한번 보세요. 보는 사람에 따라 삶과 죽음 모든 걸 초월한 듯한 무심한 눈빛일 수도 있겠고 어디 찍어 보려면 찍어보아라 하는 듯한 의연한 눈빛일 수도 있겠지요. 낡은 봉건체제에 억압받는 조선민중들을 압제에서 건지고, 외세의 침탈에 맞서 온몸으로 이 땅을 지키려했으나 역부족으로 결국 그 적에게 사로잡혀 사진까지 찍혀야하는 수모를 받으면서도 조금도 그 기개를 잃지 않는 전봉준의 눈빛은 경외감까지 느끼게 합니다.
몇 해전 대구에서 그림 하시는 분들이 역사기행을 부탁해서 안내한 적이 있었지요. 황토현 유물전시관에 걸려있는 이 사진을 보면서 그 분들 중 어느 한 분이 “다른 건 다 그릴 수 있어도 저 눈만은 어떻게 표현하지 못하겠다" 하시면서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이 사진들을 저희 집 벽에다 걸어 놓고 틈 날 때마다 본답니다. 그런데 기(氣)란게 정말 있나 봐요. 한동안 전봉준의 두 눈을 도저히 바로 보지 못했답니다. “에이! 저건 그냥 사진일 뿐이야" 하면서도 “너는 지금 무엇하고 있느냐?" 하는 듯한 사진과의 눈싸움에서 번번이 진답니다. 그런데 그런 감정도 세월이 가고 자주 보면 무뎌지나 봐요. 요즘엔 그 눈을 보고 많은 질문을 해댄답니다.

또 다른 일행과 역사기행 안내를 할 때 일입니다. 어느 나이 지긋하신 어른 한 분이 하시는 말씀에 깜짝 놀랐답니다. 그 분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일본이 농민군 대장이었던 전봉준 장군에 대한 예우는 바로 했구먼 가마를 태운 것 보니까” 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전봉준 장군이 처음 잡힐 적에 그는 다리에 부상을 입어 보행이 어려웠답니다. 그래서 이처럼 가마에 실려 가는 것이지요. 다음은 “동학당 대두목과 그 자백"이란 제목으로 일본 『동경조일신문』 1895,3.5 일자에 실린 글이랍니다.

“동학당의 대거괴 전녹두와 최시형 등이 조선에서 상하노소 구별 없이 알려져 있는 것은 예사이고 다카모리가 서남폭동(1877년의 서남전쟁을 일컫는 것으로, 사이고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족의 반란)의 거괴로서 상하노소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래서 어제 전녹두가 불가사의하게도(한인이 생각하면) 생포되어 일본공사관까지 호송되어 마침내는 영사관에 넘겨진 것을 듣자마자, 온 성안에 서로 전해져서 요란하게 떠들고 귀하고 위대한 인물을 보려고 밖으로 나오는 자 끊임없어 일시는 일본영사관 문 앞에 검은 산을 이루었다.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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