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 집강소 설치, 신분해방 실천나서
농민군 집강소 설치, 신분해방 실천나서
  • 승인 2011.10.1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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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최초의 농민자치정부 ‘집강소‘ 통치
 

1894년 5월 7일 정부로부터 폐정개혁의 실시를 약속받은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농민군은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은 풀지 않고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와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서(原情書)를 보내 폐정개혁의 조속한 실시를 촉구했으나 정부에서는 계속 폐정개혁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전라도 지역은 정부의 무장력과 집행력이 상실되고 사실상 농민군이 장악한 상태였으므로 5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은 스스로 폐정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하여 5월 하순에는 전라도 지방에 대도소(大都所), 도소(都所), 대의소(大義所), 행군의소(行軍義所) 등의 이름으로 집강소가 설치되어 본격적으로 집강소 통치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폐정을 자신들의 힘으로 개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탐관오리와 탐학한 부호들을 색출해 징계하고, 양인과 천민의 신분해방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그간 폐단이 심했던 삼정을 개혁하고 고리채를 무효화했으며, 지주의 소작료를 압수하는 등 지주제도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방곡령을 실시하고 일본으로의 미곡 유출을 엄격히 금지하는 등 반외세적인 활동도 했습니다.
집강소가 설치되면서 동학농민군들 스스로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집강소에는 집행기관으로 서기(書記), 성찰(省察), 집사(執事), 동몽(童夢) 등의 직책이 있었는데, 이들은 집강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세징수 등 행정관련 사무를 처리했습니다. 집강소에는 동학농민군의 무력으로 호위군을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또 오늘날 지방의회처럼 의결기관을 두었는데 매 읍에 의사원(議事員) 약간을 두고 이를 통해 정책과 의사결정을 하는 등 대단히 민주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전라도 동학농민군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전봉준은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거느리고 금구 원평을 중심으로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좌도를, 손화중(孫和中)은 광주(光州) 일대를 관할하였습니다.
초기의 집강소 활동은 탐관오리와 횡포한 양반의 약탈 등에 대한 억울함을 해소하는 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점차 새로운 향촌 질서 수립을 위한 행정기관의 성격으로 강화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집강소가 전라도 전역에서 설치되어 활동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지영은 그의 저서 <동학사>에서 나주, 남원, 운봉 등은 지방관과 유림들의 항거로 집강소가 설치되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나주에는 최경선, 남원에는 김개남, 운봉에는 김봉득이 각기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토벌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나주성(羅州城) 전투상황을 그곳에 살던 이병수 라는 유학자가 저술한 <금성정의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월 1일 최경선이 3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나주로 내려오자 접주 오권선이 나주 지방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금안동에서 합류하여 몇일 세를 규합한 후 금성산에 올라 7월 5일 해질 무렵에는 산에서 서성문쪽으로 진격했습니다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함성을 지르며 성문을 부수고 한편에서는 성을 기어오르려 했으나 관군이 이에 맞서 대완포 장대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동학농민군의 나주성 공략은 많은 희생자를 냈을 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남원은 이미 김개남이 점령하여 집강소가 설치되었건만 이렇듯 나주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전봉준은 나주에 있는 최경선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 후 8월 그믐께 몸소 수하 몇 명만을 대동하고 나주로 향했습니다.
8월 13일 나주성 서문에 당도한 전봉준 일행은 비무장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나주 목사 민종렬과의 면담을 요구하였습니다. 정말 대담하지요. 그러나 전봉준은 민종렬과의 담판에 실패하고 성내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밤새 민종렬과 그 부장들은 다음 날 아침 전봉준이 성밖으로 나가는 순간 뒤에서 총을 쏘아 죽이려는 음모를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전봉준은 출발에 앞서 민종렬의 부장들을 불러놓고 난데없이 그들이 입고 온 10여 벌을 벗어 내놓으며 말하기를 “ 이는 우리가 입고 온 복장이다. 두어 달 동안의 더위와 장마에 돌아다닌 결과 땀과 때로 인해 이렇게 더러워졌으니 그대들이 사람들을 시켜 빨래를 해 놓으면 내가 이 길로 영암을 내려갔다가 3, 4일 후 반드시 올 것이니 그때 옷을 바꿔 입을 수 있도록 해주면 고맙겠다”고 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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