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벌, 벌, 벌과의 한철 열두 번째




드디어 그날이 왔다. 우리의 벌치기 유목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그날,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리는 ‘그날’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날이 ‘그날’인 줄은 몰랐다. 범죄행위가 거의 완료된 뒤에서야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듯이,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그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그것이 사건이라는 걸 겨우 알아차리는 참으로 허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그날 이가 시리도록 절감해야 했다.

모든 사건은 하나 이상의 징후가 있기 마련이다. 그날 우리에게는 적어도 4종류 이상의 이상 징후가 있었다. 첫째는 이동이 예정된 벌통 안에 꿀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둘째는 안개가 너무 많았고, 네비게이션이 자주 이상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으며, 포르쉐라나 뭐라나 하여튼 대당 가격이 수억씩 한다는 외국산 자동차 동호인들이 거리를 장악해버린 까닭에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하늘에 별을 보고 진퇴 유무를 결정했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그날의 예정된 모든 행사를 취소했다지만, 기계의 힘을 믿고 따르는 현대인으로서의 우리는 그 모든 이상 현상을 ‘대범’하게 무시해 버렸다.

“아니 이거 웬 꿀이 이렇게 많이 들어와 있지? 이걸 따야 해, 말아야 해?”

아마 오후 5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동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벌통을 열어서 철사로 고정하는 작업을 하다 말고 우리는 살짝 고민에 빠졌다. 열에 살고 열에 죽는 것이 벌이었다. 꿀은 열이 많은 식품이었다. 때문에 이동할 때는 가능한 한 벌통 안에 꿀이 없도록 하는 게 벌치기 세계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이동은 시흥에서 문산까지, 두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고, 때문에 우리는 이까짓 것 이동이라 할 수도 없는 거리라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 시체더미



실제로도 상차를 다 끝냈을 때의 시간이 여덟시도 안 되어 있었다. 현장에 도착해서 정리를 다 끝내고 느긋하게 저녁식사를 한다 해도 아직 열두 시가 안 될 터이었다. 대구에서 시흥으로 왔을 때 아침까지 작업을 한 것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 식의 아주 간단한 이동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트럭운전기사와 중간에 어디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출발했던 것인데, 그런데 시흥을 채 벗어나기도 전부터 안개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삼십여 분도 안 되어서 가시거리 50미터나 겨우 될까 싶을 정도로 자욱해져 버렸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잘 따라오고 있지요, 잉?”

후배는 수시로 전화를 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내 운전 실력을 아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내 차에는 네비 아가씨도 없었다. 후배는 네비 아가씨가 일러주는 대로 선도를 잡고 있었고, 나는 그저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이후 한 시간쯤을 달렸으니 지금쯤 서울을 가로질러 자유로 인근에 왔겠거니 싶었는데 느닷없는 원주 방면 이정표가 보이는 거였다.


# 많이 더웠는지 위로 올라온 벌들



“뭐냐 이거, 원주? 아니 왜 원주방향 표시가 여기서 나오지?”

무슨 마법 같은 것에라도 걸려버린 것 같았다. 깜짝 놀라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해보니 후배녀석은 자기도 기가 막혀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는 듯 킬킬대고 있었다.

“아따 참말로 웃겨 버리요, 이거 잉?”“야, 그 여자가 잠깐 정신이 나갔나보다, 얼른 깨워라.”
“히히히. 형님은 마누라가 없으니 네비 아가씨도 없고, 슬프지 않소?”

녀석은 여전히 킬킬대고 있었다. 그래, 웃자. 이럴 때는 웃는 것밖에 달리 뭐 할 게 있겠느냐. 우리는 전화기에 대고 한참을 웃어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한가한 정신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정도의 실수랄까 일탈이랄까, 함정이랄까 하여튼 원래의 생각과는 다른 상황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넉넉한 심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넉넉함이 반복되면 어떻게 되는가. 어디인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나들목에서 차를 돌려 다시 고속도를 탔는데 그놈의 네비 아가씨는 한 시간여가 지난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비몽사몽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얼래? 여긴 또 강화도 방향이라네? 뭐냐 이거∼어?”
“아따 정말 돌겠네. 뭐여 정말, 이 여자가 왜 이래?”
“야 그놈의 것 떼어내 버려라. 언제부터 네비 따위를 믿고 살았다고.”



# 텅 비어버린 벌통


우리가 그렇게 갈팡질팡 고속도로를 유람하고 있는 동안 트럭운전기사는 휴게소에 이미 도착했다고 전화가 몇 번이나 오고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자동차 시동 끄지 말고 기다리시라는 말이나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을 뿐이었다. 속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방황이 그 뒤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만나기로 한 휴게소에 겨우 어떻게 도착해서 시간을 계산해보니 무려 두 시간여를 고속도로에서 허둥거리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네비는 자주 업그레이드를 해줘야지 안 그럼 오류가 나오긴 해요. 그래도 좀 너무했네.”

트럭운전기사 아저씨의 코멘트 앞에서 우리는 코를 빠뜨린 채 그저 라면국물이나 후루룩 마실 뿐이었다. 무진기행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뭐냔 말이다. 쓴웃음이나 실실 웃어가며 텅 빈 연료통을 채우고 다시 출발해서 드디어 자유로에 들어섰지만, 갑자기 도로사정이 아주 안 좋아지고 있었다. 안개 때문이 아니었다. 무슨 날파리 같은 것들이 왱왱 소리를 내며 앞으로, 뒤로, 옆으로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도무지 불한해서 운전을 할 수가 없는 거였다.

생김새는 날파리 같지만, 그 가격은 거대한 덩치의 16톤 트럭보다도 훨씬 비싸다고 트럭운전기사는 말하고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그놈의 날파리 같은 자동차 무리 때문에 운전을 포기하고 자유로 어디쯤에 그냥 서 있어야만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날파리들은 스포츠카 동호회원들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자유로에 차량 통행이 뜸해지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스포츠카 회원들이 가끔 연습장으로 쓴다는 거였다. 트럭 운전기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 때문에 전진을 아예 포기하고 길가에 차를 세운 채로 그들의 ‘미친 짓’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거였다.

“오늘은 보니까 포르쉐뿐인 것 같은데 어떤 날은 페라리, 재규어, 다 나와요.”

영화 ‘이유없는 반항’으로 유명한 제임스 딘이 포르쉐 몰다가 죽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나마나 호기심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고 짜증만 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가. 트럭운전기사는 이미 답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 죽은벌



“우리가 말이에요. 전에는 우리가 천만원 대의 보험만으로도 충분했어요. 그런데 요새는 말이에요. 저놈의 날파리들 때문에 억대의 보험을 들어야만 해요. 저것들은 백미러 하나 살짝 스치기만 해도 금방 몇백 만원 견적 나온다니까요. 쟤들은 일단 시동을 걸었다 하면 최하 백오십이에요. 삼백을 넘는 것도 일 같지 않아요. 우리가 하도 답답해서 경찰을 부르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저만치서 경찰 경광등이 보이면 쟤들은 벌써 반딧불이처럼 작아져 있어요. 쒱, 가 버리는 거죠.”

“아니 그래서, 어쨌든, 이렇게 대책없이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다, 이런 겁니까 지금? 저 싹동머리 없는 것들을, 응?”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라고 안 합니까.”“법이 기다리기만 하라고 되어 있다고?”

“그런 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쫓아가서 어떻게 하라는 법도 없어요. 돈 많은 사람이 돈 자랑을 하고 다녀서는 안 된다, 뭐 이런 법도 없어요. 린치만 해도 그렇죠. 우리는 다해서 삼 명입니다, 삼 명. 아세요? 쟤들은 지금 몇인줄 아십니까. 게다가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청춘들이에요.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인 한편으로 자본주의 국가이기도 하단 말이거든요. 자본주의, 이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자본이 많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지만 적은 사람은 용서할 만한 일과 용서하지 못할 일이 있단 말이 되는 거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말입니다. 쟤들과 우리가 싸웠다 칩시다. 그래서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칩시다. 그래서 법정에 서게 되었어요. 법정의 판결이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 아 남은 벌통의 벌들도


운전기사 아저씨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자칫 하다가는 노상에서 토론을 벌이게 될 것 같았다. 토론이야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토론이란 기껏해야 성토장밖에 안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끝은 결국 비분강개 이상은 기대할 수 없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고 돌렸지만,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일 뿐이었다.

“자기들 손으로 돈을 벌어서 저런 비싼 차를 끌고 다니지는 않을 거고, 대체 어떤 사람들이 자식한테 저런 싸가지 없는 차를 사 주는 걸까요?”
“그야 모르죠. 다만 이런 생각은 해보죠. 정말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저런 차나 사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아, 그거 명언이시네요. 기억해둡시다.”

그런저런 한갓진 이야기를 하느라 소비한 시간이 얼마였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후배 녀석은 포르쉐 예찬을 하고 있었다. “형님. 우리도 언능 돈 벌어서 저런 차 한 대 사봅시다? 안 될 것 뭐 있어요?”하며 킬킬대는 것이었다. 그래 안 될 것은 없겠다마는, 그런데 하필 저런 것이냐? 우리도 언능 돈 벌어서 목성이나 화성 탐사선 하나 만들어봅시다,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없는 것이냐?

“아따 이 양반, 이런 판에서까지 사회과학을 하려고 하시네.”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날파리들은 뭐라고나 할까. 이런저런 수식어 붙일 필요도 없이 그냥 죽지 못해 환장한 날파리들일 뿐이었다. 최저 속도 150으로 왱 달리다가 급제동을 하고, 그 자리에서 180도 회전을 해서 다시 왱 달리다가 또 급제동, 급가속, 급제동, 급회전, 급가속, 이런 식의 하나도 창조스럽지 못한 짓이나 끝도 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그놈의 날파리들을 보고 있자니 마라톤이며 사이클 같은 이 세상 모든 속도위주의 스포츠에 환멸이 생기려 하고 있었다.

1분, 아니 십초, 아니 영점 영영일초 차이로 금, 은, 동메달이 결정되는,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금 먹었다”고 소리소리 질러대며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부짖는,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을 걸었는데 망했다고 망연자실해서 주저앉아 버리는 스포츠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응? 그렇게 영점 영영영일초에 목숨을 거는 오늘의 스포츠는 미래의 무엇이 될 것인가 말이다.



# 죽은벌


어쨌든 우리는 몹시도 심란하고 우울했다. 그래서 아마 트럭운전기사가 아예 시동을 꺼놓고 있다는 것도 의식을 못했을 것이다. 벌통을 실은 트럭이 중간에 시동을 꺼버리면 그 벌들은 자체의 열로 인해 봉판이 녹아 버리고 나중에는 벌도 다 죽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또 하나의 다른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파리들이 썰물 빠지듯 퇴장한 뒤에 움직여서 임진강 다리 앞의 초소 옆 공터에 겨우 도착했는데 트럭이 그만 멈춰 버렸다. 우리가 목적한 공터는 지상에서 1미터 정도 높은 위치에 있었고, 15도 정도의 경사로 되어 있는데 무슨 웅덩이 속으로 뒷바퀴 하나가 빠진 채 나오지를 못하는 거였다. 삽으로 흙을 파내고 돌을 주어다 채우는 등 어둠 속에서 난리를 피우는 동안 초소에서 놀란 군인들이 달려 나왔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우리가 목적한 곳에 봉장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들어야 했다.

안 되는 이유는 첫째, 연대장님이 무시로 순시를 나오기 때문이고 둘째,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유탄에 의한 피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이유야 감당할 수 있다 해도, 유탄에 의한 피해라면 결국 사망사고도 각오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아이구야, 안 되겠다 해서 군인들에게 적당한 장소 하나 알려달라고 애걸을 하다시피 했더니 대뜸 한 곳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저녁 10시 무렵이면 배치까지 완료되리라 여겼던 이동 작업은 다음날 새벽 4시도 넘어서야 완료될 수 있었다. 시간이 예정보다 6시간이나 늦어지고 보니 육체의 피로도 또한 말씀이 아니었다. 해서 배치를 끝내고 벌통마다 문을 열어주고는 그대로 차 안에 앉은 채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차창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햇살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와서 십 분도 채 안 되어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움직이는 벌의 개체수가 시흥에서와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어 있다는 것을.

뭐냐, 왜 이러냐 이거?

눈에 띄게 벌이 적은 통 하나를 열어보고 우리는 그대로 우뚝 서 버리고 말았다. 벌이 없었다. 모두 죽었다. 꿀은 통 안에서 질질 흐르고, 그 꿀 속에 벌들이 죽은 채 엉켜 있었다.



# 죽은 벌


그나마 꿀이 적게 들어 있었던 벌통은 한 마리의 피해도 없이 무사했지만, 벌의 개체수가 많거나 유별나게 부지런하거나 하여튼 어떤 이유에서든 꿀이 많이 차 있었던 벌통은 단 한 마리의 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조리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날의 내 일기는 아주 청승맞게 흐르고 있었다.

“뚜껑을 열어놓고, 선 채로 넋이 빠져서,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죽은 것들을 들여다본다. 쏟아놓고도 보고, 엎어놓고도 보고, 뒤집어놓고도 본다. 이렇게 봐도 죽었고, 저렇게 봐도 죽었다. 꿀은 줄줄 흐르고, 벌들은 죽었고, 아니 아예 젓담아져 버렸고, 하늘을 한 번 보고 다시 보지만, 여전히 죽었구나. 죽어 버렸구나. 새끼도 죽고, 어미도 죽고, 태어나기 전의 알도 죽고 애벌레도 죽고 다 죽었구나, 죽어 버렸구나. 새우젓처럼 뭉개져 버렸구나, 젓담아져 버렸구나.”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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