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5 - 서울 성곽편 3 동소문∼북악산∼북소문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호에 이어 이번 호에선 동소문(혜화문)부터 북소문(창의문)까지의 코스를 살펴봅니다. 40년 가까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북악산을 넘는 코스로 서울성곽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40년 가까이 인적이 끊겼던 북악산 성곽은 어느 곳보다 생태 보존이 잘 된 지역이다.


`북악산`은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 중 으뜸이었다.

백악산으로도 불렸던 북악산의 높이는 불과 342m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낙산(125m), 인왕산(338m), 남산(남, 265m)과 비교하면 가장 높다. 위치도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바로 뒤에 있어 내사산의 주산 혹은 진산으로 불린다. 풍수지리학상으론 북현무에 해당하는데 사신 중 가장 힘이 센 게 현무라고 한다.

백악산(白岳山)이란 이름도 주목할 만 하다. 보통 300미터 남짓 되는 산의 호칭으론 드물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백`과 `악`은 모두 높거나 웅장한 산에 주로 사용됐던 글자였다. 백두산(白頭山), 월악산(月岳山)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북악산`이 갖는 의미는 컸다.

"청와대 독점할 수 없다"





# 북악산 `청운대`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광화문 도심 전경


혜화문에서 창의문에 이르는 북악산 코스는 서울성곽 답사에서도 그 중요성이 큰 곳이다.

북대문이 중심을 잡는 가운데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창의문을 만날 수 있다. 40여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조선시대부터 관리돼 온 소나무 등 식물들도 잘 보존된 지역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소나무는 조선 개국 초부터 특별 보호 대책을 세워 관리됐는데 조선조 내내 잘 보존돼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 숲이 방치되면서 능선 주위에만 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북악산 코스는 1968년 이른바 1·21 사태 이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줄곧 일반인들의 발길이 철저히 차단돼 있던 곳이다. 그러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시절인 2006년 4월부터 단계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해 지금은 전면 개방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아름다운 북악산을 언제까지 청와대가 독점하고 있어야 하는가"라며 "서울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언급했다.

북악산 코스는 와룡공원∼말바위안내소∼숙정문∼북악산 정상∼창의문 구간으로 4.4km에 이른다. 지난번 코스의 마지막이었던 혜화문에서 출발하면 약 5.5km에 달하는데 소요 시간은 3시간 안팎이다. 젊은 남성의 경우 빨리 돌아보면 2시간에 도는 것도 가능하다.

`신분증 지참 필수`

북악산 코스의 또 다른 장점은 서울성곽 코스 중 유일하게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악산 코스는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2회에 걸쳐 무료로 해설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각각 말바위 안내소와 창의문 안내소에서 출발한다.

자상한 해설사들의 설명은 북악산 뿐 아니라 서울성곽 전체에 걸친 것이어서 이왕 마음먹고 간다면 프로그램 시간에 맞춰가는 것이 좋다. 북악산에서 보이는 남산과 인왕산, 북한산과 관악산까지 풍부한 해설이 곁들여진다.

창의문 안내소의 경우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하지만 곧바로 산 정상에 이르는 이른바 `죽음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지칠 수 있다. 혜화문에서 시작해 와룡공원을 거쳐 말바위쉼터에서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하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다.

이 경우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다. 간혹 와룡공원에 자가용을 주차시킨 뒤 북악산을 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성곽 답사가 끝난 뒤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불편이 있다. 양쪽 코스 모두 입장 시간이 오후 3시까지여서 시간 조절도 필요하다.

군사시설 지역이라 사진 촬영은 허용된 곳에서만 가능하며 탐방로 중간마다 군인들이 배치돼 있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란 인사를 먼저 하면 친절하게 답례해 준다.

"엄숙하게 다스린다"

지난번 마지막 장소였던 혜화문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5번출구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깝다. 다시 한 번 동소문을 돌아본 뒤 경신고등학교 담장을 돌아 서울과학고등학교 쪽으로 가다보면 몇몇 건물은 성곽을 기초로 담장을 세우는 등 드문드문 성곽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과기고 앞 왕돈가스 집은 서울에서 유명한 음식점으로 식사하기에도 괜찮은 곳이다.




# 골목길 안에서도 성곽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왕돈가스 집 마주편으로 끊어졌던 서울성곽이 다시 시작돼 와룡공원으로 이어지는데 우거진 수풀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기 안성맞춤이다. 늦은 오후 무렵이면 인근 대학로에서부터 올라온 젊은 연인들이 많다. 혜화문에서 와룡공원을 거쳐 말바위쉼터까지는 빨리 걸으면 40분, 여유있게 걸어도 1시간이면 가능해 인근 주민들의 산책로로 인기가 높다.

말바위쉼터에 이르면 출입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함께 제시하면 출입증을 발급받는다. 해당 시간이 되면 해설사가 나와 인사를 하는데 기자가 간 날은 대구에서 올라온 일가족 3명을 포함 4명이 동행해설을 들었다. 보통 평일엔 1백명, 주말엔 3백명 안팎으로 북악산을 찾는데 요즘처럼 무더울 때는 해설사 혼자서 다닐 때도 있다고 한다.

말바위쉼터에서 나와 5분 남짓 가면 곧바로 북대문(숙정문, 소지문·昭智門)을 만나게 된다. 4대문 명칭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강조했던 `인의예지신`을 바탕으로 이름이 지어졌는데 북대문은 `지`에 해당한다. 숙정문(肅靖門)은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남대문인 숭례문(예를 숭상한다는 뜻)과 대비되는데 `정`자엔 `꾀·지혜`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한다. `인의예지`가 4대문의 이름에 담겨 있고 `신`은 타종행사가 열리는 보신각의 명칭에 들어갔다.





# 숙정문. 어설픈 복원으로 현대식 현판이 걸리게 됐다.



1396년(태조 5) 처음 성곽을 쌓을 땐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1504년(연산군 10)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겼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만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엔 굳게 닫아뒀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만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둔 채 기우제를 지냈다. 북쪽은 음, 남쪽은 양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어 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있었는데 1976년 박정희 전 대통령 때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다. 숙정문의 현판이 현대식으로 오른쪽에서 시작된 것도 그 이유다. 숙정문 앞으론 과거 요정으로 유명한 삼청각이 보인다.

숙정문을 나와 10분쯤 가다보면 촛대바위가 나온다. 가장 먼저 복원돼 개방된 구간은 원래 여기까지 였다. 멀리 남산과 관악산이 보이고 경복궁과 광화문 거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곳에선 촛대바위 뒤편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윤곽을 알기 힘들지만 뒤에 오르는 청운대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단지 바위 위쪽으로 튀어나온 작은 지석 하나는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일제시대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가 설치한 쇠말뚝을 뽑은 자리다. 균열을 방지하기 위해 지석을 설치했다.








# 촛대바위(아래)와 지석. 일제 시대 정기를 끊기 위해 이 곳에 말뚝을 박았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

촛대바위에서 다시 10여분쯤 가면 곡장이 나온다. 곡장은 성곽 밖으로 돌출된 굽은 성곽을 말하는데 일반적인 성곽 모양에 대한 해설을 들으며 눈으로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청운대`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기 보단 북악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중 하나로 서울시내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청운대에 도착하기 직전 해설사가 문득 "오늘 오신 분들은 운이 좋으신 분들이네요"라며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순간 일행의 눈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고풍스런 성곽과 현대 서울의 전망에만 집중돼 있던 터에 생각지도 않게 울타리 너머 풀을 뜯어먹고 있는 사슴들을 볼 수 있었던 것. 이 곳에서 방목하고 있다는 사슴들은 사람들에게 많이 익숙해져 있는지 가까이 가도 경계하는 기색이 별로 없었다. 얼마전엔 새끼까지 낳았다고 한다.







# 북악산에서 방목되고 있는 사슴들



청운대를 거쳐 조금만 가다 보면 탐방로에서 1·21 사태 소나무를 볼 수 있다. 수령이 200년이 넘은 소나무인데 1·21 사태 당시 15발의 총탄을 맞았다.




# 1.21 사태 소나무. 당시 15발의 총탄을 맞았다고 한다.



백악마루는 북악산의 정상으로 조선시대 가뭄이 들면 이 곳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서울성곽은 97구역으로 나눠 공사를 했는데 그 이름은 `천` `지` `현` `황`으로 시작해 `조`로 끝났다. 그 시작과 끝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게 바로 백악마루 아래다.




# `백악산`은 `북악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백악마루를 끝으로 자하문까지는 길게 늘어서 있는 성곽을 따라 계단을 내려오기만 하면 된다. `창의문안내소`에서 출입증을 반납하는 것으로 일단 북악산 코스는 끝이 난다.

안내소 바로 앞에 있는 창의문은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이지만 이 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렸다.




# 이른바 `죽음의 계단`. 자하문에서 코스를 시작하는게 상대적으로 더 힘들다.


1413년(태종 13)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러다 1741년(영조 17) 훈련대장 구성임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년) 때 의군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하면서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됐다. 창의문은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수백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성문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인데,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던 터라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한 창의문. 아래 봉황 문양은 실제론 닭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자하문에서 버스를 이용, 하산하는 방법도 있지만 청와대 앞길을 거쳐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도 좋다. 고궁박물관을 지나 새롭게 조성된 광화문 광장까지 가는데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 혜화문-창의문 코스 (녹색연합 제작)


- 다음호에선 자하문을 시작으로 인왕선을 거쳐 사직단에 이르는 코스를 살펴봅니다. 인왕산 코스도 등산화나 운동화가 필수적인 곳입니다. -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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