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벌, 벌, 벌과의 한철: 열네 번째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산 것은 산 것이다. 살아남은 녀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내심 고민하고 있었지만 결론은 나와 있었다. 옮겨야 했다. 벌들이 꿀을 물어오기는 했지만, 겨우 자기들 굶어죽지 않을 정도일 뿐이었다. 우리가 벌통을 싣고 길을 나설 때는 꿀을 얻자는 것이었지 벌들을 키우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요 진실이었다.

채밀 한 번 못해보고 다시 이동을 해야 한다는 데서 오는 낭패감도 물론 컸지만, 화물트럭 한 대 구하는 일이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워진 ‘시국’이고 보니 오, 대체 이게 무슨 빌어먹지도 못할 짓이더란 말이냐, 하는 따위 하늘 보고 침 뱉는 식의 한탄이 절로 터지고 있기도 했다.

살펴보면 이것도 진귀한 기록이었다. 자리를 잡은 지 이틀도 안 되어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번개 같은 상황. 시흥에서 이틀 만에 꿀을 자그마치 두 드럼 이상이나 얻은 것이 망외의 즐거운 기록이었다면, 이틀도 안 되어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문산에서의 그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참패의 기록이었다. 마음 넉넉하게 그냥 예비군 훈련을 받듯이 이동연습을 했다고 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좋게만 생각하기에는 들여야 하는 노동과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았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다가 망하는 데는 대체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데 딱 그짝이었다. 우선 문산의 아카시아 꽃에 꿀이 없었고, 하필이면 화물연대의 파업이 장기화되고 있었고, 또 하필이면 국제유가가 날마다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었다.

화물연대 소속이 아닌 트럭은 이제 묻지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달라는 대로 현금을 내밀어야 했다. 연대라는 단어가 부끄러우리만치 ‘연대’를 거부하거나 혹은 연대에 들고 싶어도 들지 못하는 화물트럭이 밤잠은 물론이고 낮잠도 한 숨 안자고 거리를 누비며 그야말로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우리는 오고, 가고, 하는 그 단 이틀만에 어지간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 달치 임금을 홀랑 까먹어버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옮겨가게 될 그곳에서 아카시아 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옮겨야만 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늘이나 원망하며 죽느니보다는 그래도 움직이다가 죽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야 뭐 하늘 하래 머리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일 터이었다.

어쨌든 아카시아 꽃은 이제 막바지였다.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보잘 것 없다 해도 아카시아 꽃이 피고 지는 흐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게 또 만만치 않다. 제주도 빼고 봄이 가장 빨리 온다는 영남에서 호남 그리고 중부 내륙까지 약 보름의 차이가 있고, 중부 내륙에서 문산까지 일주일여, 다시 강화도를 비롯한 대부도 등의 서해안까지 또 일주일 남짓 차이가 있다. 간단한 예로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대부도까지는 직선거리로 얼마 안 되지만, 아카시아 꽃이 피는 날짜로 보자면 최소한 일주일 이상 열흘 가까이나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대구의 아카시아가 꽃이 져서 한참 열매를 맺고 있을 즈음 강화도 주변의 아카시아는 이제 막 꽃이 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이면 벌치기 유목인들의 마음은 살짝 심란해진다. 밤꽃이 피려면 아직 멀었고, 잡꽃은 너무 보잘 것이 없고, 그나마 꿀을 바랄 곳은 강화도 부근 아니면 대부도 인근뿐인데 ‘나’ 한 사람만 그쪽을 목표로 이동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벌통을 싣고 타지를 떠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쪽으로 집결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그야말로 박 터지는 신경전에 말씨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육박전이다. 그래서 뭔가를 좀 아는 사람은 아카시아 꿀은 이제 그만 정리하고 느긋하게 밤꽃을 기다리는 대기 상태로 들어가지만, 뭘 잘 모르는 사람은 꾸역꾸역 마지막 남은 ‘그곳’으로 기어들어간다.

우리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우리는 그야말로 꾸역꾸역 그곳으로 들어가야만 할 입장이었다. 그곳이 전쟁터라는 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굳이 들어갈 생각을 안 했겠지만, 모르니까 모르는 채로 그냥 다른 사람이 권하는 대로 그 말만 철썩 같이 믿고 들어간 것이었다.



# 이동직전


그랬다. 거듭되는 실패로 우리는 살짝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뭔가 서서히 목줄을 잡고 들어오는 듯한 공포감에 잡혀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달리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자꾸 물어보는 것이었다.

“우리 어디로 가야 해요?”

내용은 딱 그 하나였다. 다른 것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무 중요할 이유가 없었다. 오직 하나 그것,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야 아주 망하지 않고 그나마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는 거지?

우리가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산적부부’였다. 대구에서 도원결의까지는 아니나마 언약한 바도 있었고, 빗속에서 고생을 해준 전사도 있으니 당연한 생각일 수도 있었다. 정말이었다. 정말로 큰 기대를 갖고 전화를 걸어서 “갈 곳이 없네요.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하고 자존심 싹 팽개치고 애원을 하다시피 했건만 돌아온 대답은 무정도 하게 “허허허이, 뭔 소리여?” 정도였다.

우리가 그쪽으로 전화를 한 것은 그들과 한패가 되기를 원해서였다. 비굴하다 싶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하여튼 낯짝이 안서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들과 한패가 되어 함께 다니면 아주 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얄팍한 계산으로 전화를 했던 것인데 어마, 창피해라. 돌아온 반응이 “허허허”일 줄이야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해볼 수 있었으리.

‘산적부부’로서는 그게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는 했다. 그들은 이제 꿀 따는 일 그만두고 무주 구천동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인천의 돼지농장 부근 한 곳에서만 드럼통으로 서른 개 가까이나 시쳇말로 대박을 친 그들로서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무주로 가서 피로에 찌든 벌들 휴식도 주고, 새끼도 키우고, 자기들도 좀 쉬고 하면서 쉬엄쉬엄 로열젤리와 프로폴리스 채취에나 전념할 계획이라는 거였다.



# 이동


그렇다고 그렇게 단칼에 무 베듯이 ‘허허허’냐? 대구에서 닭백숙 앞에 놓고 했던 언약을 벌써 잊어버렸다, 이거지, 응? 그때 뭐라고 했더라. 어디에 있건 서로를 생각하면 돕고 살자고 했던가. 이런, 이런, 그러고 보니 나도 그 내용은 잘 생각이 안 나는구나. 어쨌든 당신들은 무정해. 말이라도 한 마디 위로받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부부 합심으로 더블침대만 가지고 다니면 다냐고, 응?

전화를 끊고 난 뒤에서야 우리는 그런 푸념에, 원망에, 비아냥에, 한탄을 늘어놓을 정도로 그렇게 심약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주저앉고 말 것인가. 이번에는 고창에서 올라온 양봉원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던 바로 그 답변을 들었다.

“걱정 마, 걱정 마, 뭐 그런 걸 다 걱정하고 그래? 나 지금 대부도로 들어갈 예정이거든. 내가 먼저 가서 자네들 자리도 잡아놓고 할 거니까, 응? 시화호 근처에서 전화를 해. 마중 나갈게.”

와아, 이렇게 시원시원할 수가. 그러면 그렇지. 사람이 이런 맛이 있어야지 말이야, 응?
우리는 드디어 살았다고 킬킬거리며 짐을 꾸렸다. 너무 즐거운 나머지 우리는 그때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양봉원 사장이 성실도 면에서는 고창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하지만 허풍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살짝 잊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실 그것은 성실이라기보다 실속이라는 말로 바꿔야 옳은지도 모른다.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따라 성실과 실속은 가끔 모호한 개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의 아내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대단히 성실한 남편일 터이었다. 반면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자기 실속만 챙기는 살짝 얄미운 사람이었다.



# 이동직후


얄미우면서도 얄밉게 느껴지지 않는 게 아마 그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서 찾기로 하자면 거기에 바로 허풍이 있었다. 대체로 봐서 말을 재미있게 하는데 그 재미있음의 근거를 추적해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요컨대 남을 위해 자신의 간이라도 금방 빼줄 것처럼 말을 하지만 막상 실제로 간을 빼줘야 할 상황이 도래하면 ‘우리 다함께 간을 찾으러 가보자’고 소리소리 질러대며 웃어대는 식이었다.

그날의 상황이 꼭 그런 짝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벌통을 트럭에 싣고 시화호 인근에 도착해서 전화를 했을 때까지도 그는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자기는 이미 벌통을 싣고 와서 봉장을 다 꾸렸다고, 우리가 봉장을 차릴 장소도 다 물색해놓았다고, 그러니까 바로 다리 건너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대부도로 들어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그와 만났다. 어둠 속에서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그를 따라서 그가 점찍어두었다는 곳으로 가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바로 트럭에 달려들어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밧줄을 다 풀고, 벌통에 막 손을 대려 하는 순간 어디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당신들 뭐야, 뭐냐고.”

고함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발자국소리,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저마다 손전등을 손에 든 남자들이, 그리고 여자들이 어디서 그렇게 나타났는지 떼로 달라 드는데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영화도 보통 영화가 아니었다. 한밤중에 마을 사람들이 온통 나서서 간첩을 잡으러 가는, 혹은 강도나 도둑을 쫓아가는 그런 긴박감 넘치는 영화였다.



# 이동직후



충청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알았다. 우리가 봉장으로 점찍은 자리를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 이내에 무려 일곱 개의 봉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낮에 각자의 봉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한곳에 모여 고스톱도 치고 ‘농담 따먹기’도 하고 뭐 그렇게 재미있는 생활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뼉다귀’ 같은 우리가 기어들었다는 것이었다. 기어들고 있는 장면을 멀리도 아닌 불과 삼백여 미터 떨어진 천막 안에서 발견하고 달려온 거였다.

그러니까 우리한테 걱정 말라고, 자기가 다 알아서 자리 잡아놓겠다고 큰소리 빵빵 친 양봉원 사장은 차를 몰고 지나가면서 공터가 있으니까 여기다, 하고 그냥 점찍어 버린 거였다. 차를 내려서 오 분 정도만 돌아봤어도 발견할 수 있었을 타인의 봉장을 바로 옆에 두고서도 까맣게 모르는 채 우리를 끌고 온 것이었다.

어쨌든 박 터지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목소리 크기로만 보자면 금방이라도 치고 박고 피투성이가 될 것 같았지만 다행이도 술에 취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까 된다, 안 된다, 함께 살자, 싫다, 하는 뭐 그런 살짝 변형된 땅따먹기 싸움인 셈이었다.

숫자는 충청도패가 남자 일곱에 여자가 세 명이었다. 우리는 셋이었지만 에너지 면에서 보자면 한 명 꼴밖에 안 되었다. 나나 후배나 그런 상황이 처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결국 양봉원 사장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그래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 대부도 입구


뭘 모르는데다가 목소리마저 작은 나는 아예 차로 들어가서 앉아 버렸다. 절망이라든가 자포자기 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개되는 상황이 너무 낯설어서 일단 관망을 해보자는 심사였다. 충청도 패들도 여자들은 차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내가 앉아 있는 차 바로 옆으로 몰려와서 떠들어대는데 그 내용이 참 뭐라고나 할까, 가관이었다.

“저것들이 어디 갈 곳을 못 찾고 흘러들어온 것 같은데 큰일이네.”
“저 인간이 저거, 이빨 한쪽도 안 들어가게 생겼어. 끄덕도 안 하는구먼 뭐.”
“저 많은 벌을 데리고 와서 어쩌자는 겨. 이백 통도 넘겠네. 우리 옛날에 많이 할 때와 같잖여.”
“이유 없어, 무조건 쫓아내야 혀.”

어허이 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본의 아니게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상황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차 안에 사람이 있다는 신호를 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한참을 쩔쩔매다가 그냥 엎드려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충청도 패들 역시 벌치기들이라 벌을 트럭에 오래 두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보다도 오히려 허둥거리며 적절한 장소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최종 결론을 내놓았다. 자기들이 평소에 봐둔 장소가 있으니 그쪽으로 안내해 주겠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따라서 일단 그 장소를 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양봉원 사장이 한 마디 했다.



# 대부도의 새벽


“없으면 아까 그 자리에서 그냥 버티는 거여. 아카시아 철에는 다 그래.”

그는 웃고 있었다. 우리도 웃었다. 웃지 않고 뭘 어쩔 것인가. 그의 웃음소리는 컸다. 우리의 웃음소리는 작았다.

충청도 패들이 우리를 안내해간 그곳은, 아닌 게 아니라 제법 널찍한 공터가 있기는 했다. 아카시아도 흐드러졌다. 그러나 이미 벌통이 들어와 있었다. 어제 들어왔다고 했다. 충청도 패들은 우리를 또 다른 데로 안내했다. 그곳에도 벌통은 들어와 있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데로 갔다. 그들은 최근 오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대부도에서 ‘놀았다’고, 그러니 염려말라고 우리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안심할 것인가.

아마 족히 서너 시간 정도를 그렇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결국 대부도 구석구석을 완전히 탐험한 셈이었다. 그러다가 막판에 뜻밖의 장소 하나를 발견했다. 전곡항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 도로변으로 대충 잡아서 백여 평 정도의 잡초가 우거진 공터(?)가 이리로 와라, 하는 듯이 얌전하게 펼쳐지는 거였다.

“여기다, 여기서 하자. 아 참 살아남기 어렵다.”

그렇게 서둘러 봉장을 설치하고 났을 때는, 날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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