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르네상스 이끌었지만… “정순왕후 ‘권력행사’ 양반사회 부패 타락”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 이끌었지만… “정순왕후 ‘권력행사’ 양반사회 부패 타락”
  • 승인 2011.11.2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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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그럼 이토록 조선후기 양반사회가 부패 타락한 원인은 무엇이고 그 모습은 어떠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조선건국이래 국가가 안정되고 문화발달의 최고 전성시기는 세종∼성종의 시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맞이하여 조선 사회는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전쟁의 피해는 참혹했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부상 그리고 집집마다 불타거나 폐허가 되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전쟁 중 버려진 농토로 인하여 식량생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농민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버려진 농토를 개간했고 정부에서도 이런 농민들을 위해서 개간을 장려하면서 세금을 줄여주는 등 노력을 했답니다.

한편 과거 성리학만이 최고의 학문이고 기술학이나 과학 등은 천하게 여기던 학자들도 반성의 기운이 돌아 농업, 어업, 천문, 지리 등의 백성을 위해 도움이 되고 실제 생활에 활용될 수 있는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져 연구하게됩니다. 이른바 실학이지요. 사실 성리학은 개인의 인격수양에는 도움이 되는 학문이었지만 실학처럼 국가와 농민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거든요. 

이렇듯 정약용 같은 진보적인 실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역동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경제와 문화가 다시 전쟁 전처럼 복구되고 사회가 안정 되어가지요. 이 때가 영조와 정조 시기입니다. 말하자면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1800년 조선 22대 임금이신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순조가 즉위(즉위 당시 11세)하면서부터 헌종, 철종 등 공교롭게 3대에 걸쳐 나이가 어린 왕들이 즉위하게 됩니다. 어린 순조 대신 영조의 부인이었던 정순왕후가 권력행사를 하게 되고 그 결과 그 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게 됩니다.

정순왕후가 죽은 후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잡게 되었답니다. 순조의 왕비가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헌종(즉위 당시 8세)이 즉위하게 되면서 헌종의 어머니가 풍양 조씨였기 때문에 풍양 조씨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가 다시 철종 때 와서 철종의 왕비가 안동 김씨였기 때문에 다시 안동 김씨들이 모든 고위관직을 독차지하게 되는 데 이렇듯 한 가문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비정상적인 정치를 세도정치라고 합니다.

원래 세도(世道)란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길’이란 뜻이지요. 그러나 그 본래의 뜻과는 달리 권력의 집중화와 그로 인한 관료들의 부패 타락을 가져왔지요. 세도 가문들은 벼슬자리를 돈을 모으는 수단으로 여겨 아예 드러내놓고 관직을 돈을 받고 사고 팔게됩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뜻 있는 선비들은 관직에 나가기를 꺼려하고, 뇌물을 바쳐서라도 관직을 사겠다고 설쳐대는 자들만이 중앙과 전국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었답니다. 오늘날 도지사 자리인 감사 자리는 보통 5만∼6만냥, 시장·군수 자리인 수령 자리는 2만∼3만냥 정도에 거래되었답니다.

한편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산 수령들은 그 본전을 뽑기 위해서, 또 자신들을 돌보아주는 세도가들에게 상납하기 위해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농민들이 부담해야 했던 세금은 농토에 부과된 전세, 군대 안가는 대신에 매년 내는 군포, 그리고 원래 취지는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 실시한 환곡이 있었는데 이를 삼정이라 했습니다.

관리들은 이러한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온갖 이름을 붙여 부정을 저질렀으며 그 결과 정해진 양의 몇 배 이상으로 거두어 들였습니다. 무거운 세금과 관리들의 폭력에 지친 백성들이 선택해야 할 길은 뻔했겠지요. 고향을 버리고 떠돌거나 구걸하는 걸인이 되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관청에 저항하는 길밖에 없었답니다.

그리하여 1811년 홍경래의 봉기와 1862년 진주농민봉기를 계기로 전국 70여 고을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까지 수탈의 대상이었던 농민들이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저항의 주체로 결집되어 갔으며 이를 통해 민중들의 정치 의식, 사회의식은 더욱 높아져 갔지요.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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