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벌, 벌, 벌과의 한철: 열일곱 번째


# 거의 완벽하게 꽉찬 봉판


라디오에서 말했다.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비가 온단다. 오랜만에 집에나 가봐야겠다. 결심을 했지만, 오리 농장 사장과 더불어 낮술에 살짝 취하고 밤술에 아주 취해 버렸다. 차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잠이 들었던가. 이상하게도 하수도 같은 지하의 통로에서 끝도 없이 쫓기는 꿈을 꾸었다.

놀라서 퍼뜩 눈을 뜨고 보니 무슨 암흑 소굴에라도 떨어진 것처럼 달도 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살짝 겁을 먹은 채로 밖으로 나와서 보니 그제야 멀리서 송전탑의 경고용 깜박이 등 하나가 깜빡거린다. 지나가는 자동차 한 대 보이지 않는, 캄캄한 도로변에 쭈그리고 앉아서 커피나 한 잔 끓여 마시자 하고 버너 불을 켜는데 굵은 빗방울이 이마를 때린다.

깊은 밤, 숲 속의 차 안에서 듣는 빗소리가 요새 애들 말로 짱이다. 환상이다. 심포니다. 그 무엇에도 견줄 바 없는 음악이다. 이것은 물론 당연히 내 감성이 질러내는 환호일 뿐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다. 객관이거나 말거나 천둥소리 큰북처럼 울리고 굵은 빗방울은 설장고처럼 혹은 난타처럼 심장을 두드려댄다.

음악소리에 맞춰 하나둘 옷을 벗었다. 옷을 벗고 밖으로 나왔다. 날카로운 스타카토, 아니 부드러운 진양조, 수천 개의 빗방울이 내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순간 나는 오, 전율한다. 전율해 버린다. 물에 몸을 맡겨본 지 얼마만인가. 신이 나서 그냥 아스팔트 도로 위로 뛰쳐나갔다.

지난 날 문산으로 이동할 때 흘린 땀이 아직 몸의 곳곳에서 아우성을 친다. 얼른 벗겨 달라고, 얼른 씻어내 달라고. 시원하다. 후련하다. 추위보다 더 지독한 것이 내게는 아마도 군실군실함인 것 같다.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몸에 물 끼얹는 행위 자체를 즐겨온 내가 이 무슨 꼴인가, 싶기도 해서 쭈그려 앉은 채로 현 상황을 더듬어 본다.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전조등 하나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게 뭐냐. 구부러진 길 저쪽에서 자동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단 한 대도 지나가지 않던 자동차가 하필 이런 때 달려올 건 또 뭐람. 재빨리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자동차가 지나간 뒤에 다시 아스팔트 위로 나오려 하는데 이번에는 요트 경기장 쪽에서 전조등이 달려온다.



# 영흥도의 새벽


허헛 참 내.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 것이냐. 가만 생각을 해보니 어느새 밤도 지나고 벌써 새벽인 모양이었다. 인천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혹은 서해안 고속도를 타고 온 사람들이 인천으로 갈 때 지름길로 즐겨 이용하는 바로 그 도로 위에서 내가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목욕을 포기할까. 아니지. 새벽에 출근하는 자동차가 다가오면 얼른 몸을 숨기고, 지나가면 다시 나오는 식의 스릴 만점인 ‘물놀이’를 얼마나 했던가.

춥다. 으슬으슬 떨린다. 온 몸에 닭살이 돋아 오돌토돌한 것이 마치 내가 닭고기라도 되어버린 기분이다. 이것도 체험인가. 이것도 공부인 것이냐. 그래,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러나 두 번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또 어쩔 수 없다.

목욕, 아 이놈의 목욕. 어디에서든 차를 몰고 나가서 한 시간여만 돌아보면 목욕탕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감히 차마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까닭이 무엇인가는 나도 모른다. 가는 데 한 시간, 오는 데 한 시간, 목욕탕 내에서 적어도 한 시간 이상 두 시간, 합하면 네 시간이 되는데 그 시간 동안 벌이 개도 아니고 무엇이든 사건이 있을 수 있다는 염려였을까.

그런 것도 같지만 꼭 그것만도 아닌 것 같다. 실제로 벌통 도둑이 있기는 했다. 트럭을 몰고 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관리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봉장에 들어가서 벌통을 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런 도둑이 무서워서 내가 목욕탕을 찾아갈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라는 인간은 본래 그렇게까지 막강한 책임감으로 무장한 종자가 못 된다.

그러면 뭐냐.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토록 목욕탕 한 번 갈 생각을 못한 채로 그저 목욕, 목욕, 목욕 노래만 불러대게 했는가. 지금 생각하면 그 무렵의 나는 어떤 도그마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기왕 유목을 나선 거라면 기술문명의 포위망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어지자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그게 아니라면 유목이고 뭐고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냐 하는, 딴에는 모질게 절박한 각오랄까 결심 같은 것이 있었다.

하루 종일 올 것 같던 비는 오전 중에 멈췄다. 비가 멈추자마자 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는 저쪽으로 나는 이쪽으로, 수천 수만의 벌들이 허공을 휙휙 가르며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두세 시간 정도나 겨우 맑은 하늘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돌연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번개가 치고 가까운 곳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난리가 아니다.



# 거침없이 자라는 소나무


바닷가, 그것도 돌출된 섬에서 만나는 비는 무서웠다. 삼천 년이나 오천 년 정도의 한을 품은 악귀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타도, 타도를 외치며 진군해 오는 것 같다. 그런 비는 이미 비가 아니다. 바람도 이미 바람이 아니다. 바로 옆에서 나무가 부러지고, 전깃줄이 맹렬하게 흔들리면서 총알 날아가는 소리를 낸다.

망했다. 꿀을 딴다고 밖으로 나간 벌들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느닷없는 비바람에 놀라 나뭇잎 같은 데서 간신히 어떻게 비는 피하고 있겠지만 몸은 이미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날개의 어딘가에, 촉수의 어딘가에, 혹은 다리의 어딘가에 발생한 아주 미세한 상처만으로도 벌은 날지를 못한다. 난다 해도 돌아가는 길을 찾기가 어렵다. 비가 그친 뒤에 더러 돌아오는 녀석들도 있긴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훨씬 많은 숫자의 벌들이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서울을 떠나 농촌 생활 10년이 넘었지만 그렇게 요란한 비바람은 처음이었다. 섬이라서, 바닷가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게다. 어쨌든 그렇게 요란한 비바람이 몰아친 다음날 아침에 보니 아카시아 꽃이 다 져버렸다. 가지가 꺾어지거나 꽃송이 째로 땅에 떨어지거나, 그나마 남은 꽃들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벌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벌통을 열고 살펴보기가 두려웠다. 보나마나 밖에서 꿀을 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안에 있는 것들이나 먹어치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다 먹어치우고 나면 봉판을 뜯어먹게 될 것이다. 봉판, 애벌레들이 자라고 있는 이를테면 인큐베이터 같은 것, 벌들은 그렇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으면 새끼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자기들이 금식을 하면서 새끼들을 먹이는 게 아니라 새끼들을 죽이고 자기들이 일단 살아남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끔찍하고 냉정하다 싶기도 하지만, 또 어찌 보면 매우 합리적인, 아니 실용적인 선택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먹을 것도 없는데 새끼들이 태어나봐야 그것들은 어차피 당장에 식량을 구할 능력이 없으니 죽게 되어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주위 상황이 개선되어 식량의 소재가 발생하면 언제라도 나가서 구해올 수도 있거니와 죽여 없앤 새끼들 대신 다른 새끼를 양육할 수도 있는 것이니, 일시적으로 어린 새끼들을 키우고 자기들이 죽는 것보다는, 자기들이 살기 위해 새끼들을 죽이는, 아니 잡아먹는 편이 종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합리적이겠다는 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본받고 싶지는 않다. 합리적이라는 거, 실용적이라는 거, 이것만큼 지독한 얼음덩어리 같은 양날의 칼이 또 있을까. 이런 벌들의 생리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내가 지금 자본주의의 실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 밤에도 잠자는 법이 없는 벌들


자본주의, 오 그놈의 자본주의, 누가 그랬던가. 자본이 없는 자는 이유불문하고 노예가 되는 게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뭔가 그럴싸한 잠언 같기도 하고, 엉터리 모략이다 싶기도 하고 헷갈린다. 어쨌든 꿀벌의 세계는 자본주의의 총아라 할 만하다. 꽃에 꿀이 있는 한 자신의 생명까지 단축해 가며 꿀을 모아들이는, 생산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동료도 가차없이 물어 죽여 버리는 꿀벌이 세계는 인간 사회의 이른바 신자유주의와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어쨌든 벌통을 열어보기로 했다. 그러면 그렇지. 벌통을 여는 순간의 느낌이 벌써 다르다. 소비를 들어보니 전라도 말로 ‘홋딱개비’다. 너무나 가벼워서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꿀이 없다는 것을 알겠다. 그런데 기가 막히다. 꿀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꿀이 들어갈 구멍은 거의 없고 온통 봉판 천지다. 저장해놓은 꿀이 없으니 아마 여왕벌이 죽기 살기로 알만 낳아놓은 모양이다. 새끼들이 자라고 있는 이 봉판을 일벌들은 더 이상 꿀을 구할 수 없다 싶어지면 마침내 먹어치우게 될 것이다. 쓸데없는 왕대도 많이 생겼고, 수벌집도 꽤나 많이 생겼다.

왕대는 로열젤리로라도 쓰임새가 있다지만, 이놈의 수벌집은 참 애물이다. 부지런하기가 꿀벌 같은 함평의 ‘산적부부’는 수벌집이 정력에 아주 그만이라 해서 틈만 나면 그것들을 긁어 소주에 담가놓기도 하더만, 우리는 원체 게을러서 술 담그기는 고사하고 그것을 따로 모아볼 생각조차 아예 못하고 있었다.

덩치는 암컷 일벌의 두 배 가까이나 되면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수벌, 꿀을 따 오지도 못하고, 새끼를 키우지도 못하고, 문지기 노릇조차 못하면서 먹기는 또 ‘허천나게’ 많이도 먹어대는 수벌, 이놈의 애물단지 같은 수벌집이라도 일단 없애자 해서 긁어내기로 했다. 긁어내다 보니 뭔가가 참 얄궂다. 수컷으로 태어난 내가 수컷을 쓸모없다고 태어나기도 전에 긁어 없애고 있다니.

이게 뭐냐.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응?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계속 수컷으로 살아도 되는가 하는, 미안스럽지 않은가 하는, 용서를 빌어야 옳지 않은가 하는, 그런 한갓지고도 민망한 고민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보니 불현듯 그렇다면 산다는 게 뭐냐? 하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온다.



# 비 내린 뒤의어지러운 풍경


산다는 것. 글쎄, 그놈의 것은 대체 무엇일까. 다시 꿀벌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산다는 것도 역시 생산활동이다. 뭔가를 끊임없이 끌어 모으거나, 새로울 것도 없지만 어쨌든 새롭다고 여겨지는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거나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적어도 실용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꿀벌의 세계에서 실용주의는 여왕의 생애와 수벌의 운명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여왕은 전 생애를 걸쳐 단 한 번의 교미로 수백만 개의 알을 낳는다. 알을 낳는 개수가 줄어들면 경찰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수벌은 그토록 많이 태어나지만 극소수만이 단 한 차례의 교미 활동에 동원된다. 나머지 수벌들은 역시 경찰벌들에 의해 쫓겨나서 방황하다가 굶어죽는다.

인간 세계에서 경찰은 대체로 신체 건강한 자들이 담당하지만 벌들의 세계는 이것도 역시 실용주의에 기초한다. 젊은 일벌들이 죽기 살기로 정신없이 노동을 한 결과 늙어지면, 그래서 날개에 힘이 빠지면 경찰벌이 되는데 이것은 인간 사회 아파트 단지에서의 경비원을 연상케 한다. 아무튼 이 상황을 가만히 앉아서 들여다보면 황당하게 재미있다.

경찰벌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적들을 방어하기도 하지만 내부의 수벌을 색출해서 몰아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인간 사회로 치자면 양로원이나 노인당 같은 데서 고스톱도 치고 컴퓨터도 배우고 등등, 그렇게 한가한 삶을 영위할 법한 시기에 벌들은 아주 잔인한 경찰의 임무를 부여받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경찰은 이제 곧 죽을 목숨들이다. 완전히 늙어서 힘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젊은 수벌들이 그 앞에서 꼼짝을 못 한다. 덩치도 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힘을 쓰기로 하자면 늙은 경찰벌 쯤은 일당 백으로 해치울 만도 하건만, 그저 엉금엉금 기어서 쫓겨 다니기만 한다. 쫓기다가 마침내 집 밖으로 나오면, 다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채로 여기저기 흙 속에 머리를 꼬나박은 채로 죽어가고, 죽어가는 그것들을 개미가 잔치를 벌인다고 물어간다.

그나저나 큰일 났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지? 대부도에 들어온 지 열흘째. 고창의 양봉원 사장은 고창에 복분자 수확이 시작됐다는 연락을 받고 짐을 싸서 내려가 버렸다. 우리가 대부도에 들어오던 날 그토록 완강하게 우리를 쫓아내려 했던 충청도 패들은 그보다 훨씬 전에 떠나 버렸다.



#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시간들


충청도 패들, 그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사력을 다해 우리를 견제하고 방해하려 했던 그들은, 그 뒤로 이틀도 안 되어 소리도 없이 떠나버렸다. 대부도의 아카시아 꽃에 꿀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민망해서 그렇게 인사 한 마디 없이 서둘러 떠나버린 것이다.

경륜이 많은 그들은 그렇게 어디든 갈 곳이 있었다. 벌농사 초보인 우리는 아직 갈 곳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서 밤꽃이 피었는지, 아직 안 피었으면 언제나 필 것 같은지, 그런 질문이나 입이 부르트도록 해대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직 설탕 사양을 해야만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랬다. 꿀도 없는 아카시아마저 다 시들어 버렸지만, 어디서 무슨 꽃을 발견하고 꿀을 물어오는지 벌들은 근근이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양식을 물어오고 있었고, 그래서 아직 새끼들을 잡아먹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슬아슬 조마조마한 심사로 기다리고 있었다. 남도에 밤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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