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 막둥이 결혼하던 날 엄마의 모습


엄마.

이 나이쯤 되면 어머니라 해야 온당하겠지만 입에 붙지를 않네요.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 한 번도 어머니라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열두 살 나이에 집을 나가기 전에는 전라도 식으로 ‘어무이’라 불렀었는데, 집을 나가서 철이 들어 돌아온 이후로는 왜 그랬는지 ‘엄마’라 부르고 있었지요. 서울말을 거의 완벽하게 익힌 데서 오는 어떤 습관이었겠지만, 어머니보다는 ‘엄마’가 적어도 한 뼘쯤은 거리를 좁혀주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달까, 아마 그랬던 것이겠지요?

서울말, 이것을 생각하니 새삼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서울로 취직 나간 동네 누나들이나 고모 혹은 이모들이 지녔던 새침하게 하얀 손가락들, 호호호 하는 웃음소리, 무엇보다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박꽃 같은 얼굴들, 나중에 알고 보니 기껏해야 남의 집 식모살이거나 버스 차장이었던 것을, 단어 속에 이미 말로는 다하지 못할 수모와 고통이 농축된 직업이었던 것을, 피부가 박꽃처럼 하얘졌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들을 선망하며 등급을 높여놓고 서울, 서울 노래를 불렀던 시절, 아,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어. 엄마도 알 거야. 그렇지?

하긴 그게 유행이었지 뭐. 폐병 초기의 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떤 지독한 매력 같은 것들, 감염되면 같이 죽을 운명이 되는데도 그것을 몰랐던,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고 싶었던, 죽을 때 죽더라도 하는 식의 극단적인 추종이었다고까지는 차마 폄하할 수 없다 하더라도, 무슨 찬란한 미래를 보장받고 그 행렬에 동참했던 것은 아니란 말이거든.

그렇게 서울말을 배웠어요. 열심히, 아주 열심히 배웠어요. 전라도 말을 쓰면 불이익을 준다는 법은 없었지만 소문이 그렇게 나 있기도 했으니까. 살아 보니까 그렇더라고.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소문이더라고. 가까이 있어야 할 법은 너무 멀고, 멀리 있어야 할 소문은 항상 너무 가까워.

아무튼 그랬는데, 어머니라고는 거의 불러보지도 못하고, 계속 서울 말투로 엄마라고만 부르다가 이제 겨우 전라도 말 ‘어무이’ 소리가 가끔 한 번씩 나오곤 했는데, 철들자 이별이라고 했던가,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없어. 아들이, ‘오살허게도’ 속만 썩이던 큰아들이 이제 겨우 철이 들어서 엄마 소리 뒤로 물리고 ‘어무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엄마는 가 버렸어. 어디로?

처음에는 나도 그냥 죽겠더라고. 죽을 것 같더라고. 잠도 안 오고, 책도 못 보겠고, 뭔가 좀 쓰자고 해도 쓸 수가 없고, 그래서 그냥 술이나 마셨지 뭐. 한 달이면 술 안 마신 날이 이틀이나 되려나. 그렇게 한 육 개월 정도를 술에 쩔어서 지냈어요. 깨면 마시고, 또 깨면 또 마시고.

그러니까 이 글은 뭐라고나 할까. 엄마를 보내버린 아들놈의 푸닥거리는 아니고, 푸념도 아니겠고, 글쎄 뭐라고나 할까, 살기 위한 몸부림? 아니여. 솔직히 말해서 삶이 그렇게 애달지는 않아.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일 뿐이라고 하면 뭔가 좀 허랑해서 꺼려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뭐 그 이상의 적절한 표현은 아직 생각나지를 않네. 아무튼 그래. 뭔가 얘기를 좀 하고 싶어. 내 손으로 엄마를 만질 수 있던 시절에 다 하지 못한 얘기,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얘기, 미처 생각이 안 나서 못했던 얘기, 그런 것들을 쏟아내고 싶은 거야.





며칠 전이었어요. 자다가 눈을 떴는데 방안 가득 하얀 기운이 뻗쳐 있었어요. 밤새 전등을 켜놓고 있었나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켜져 있는 등은 없었어요. 벌써 날이 새나? 아니면 오늘이 보름달 뜨는 날인가? 물음표가 몇 떠올랐지만 도로 눈을 감았지 뭐. 잠은 오지 않고, 머릿속으로 온갖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하는 거야. 이 그림들이 무서워서 도로 눈을 뜨고 일어났지.

방안은 여전히 옆방이나 목욕탕쯤에 전등이라도 켜진 것처럼 하얀 빛으로 가득한 거야. 뭐지? 어렵게, 참으로 어렵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았겠지? 웬 보름달이 이렇게 똑같은 빛을 내나 싶어서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눈이 와 있었어요. 첫눈은 아니었지요. 첫눈은 열흘 전에 몇 잎 뿌리다가 만 것이 있으니까, 그것을 첫눈으로 치자면 이번의 눈은 두 번째 것인데, 그런데 후북하게 아주 많이 쌓여 있더라고.

후북하게 쌓인 눈을 보며 가만히 서 있자니 김초혜 시인의 절창 한 구절이 떠오르는 거야. 꿈속에라도 자주 오시라는, 오셔 달라는 한 구절. ‘어머니’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그 한 구절의 시를 음미하고 있노라니 불현듯 조정래 선생은 참 행복하겠다,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 노래를 부르는, 부를 줄 아는 아내와 함께 하는 나날에 행복이 없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겠는가 하는 뭐 그런 부러움이었겠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당부하는, 꿈속에라도 자주 오셔 달라고, 김초혜 시인의 그런 노래를 후북이 쌓인 눈앞에서 떠올리고 있자니 엄마가 막 자꾸 생각나는 거지 뭐야. 그래서 그날 온 종일 고민을 좀 했어요. 어떻게 하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무슨 노래로 엄마에게 투정을 좀 부려보지?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이제 비록 만질 수는 없지만, 만져볼 수 없는 엄마라고 해서 엄마가 아닌 것은 아니지 않니? 하고,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어요.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 뭔 줄 알어? 사진 속의 엄마도 엄마다. 일기장 속의 엄마도 엄마다. 기억에 새겨진 엄마도 당연히 엄마다. 울고 싶냐? 그러면 울어라. 웃고 싶냐? 그러면 웃어라. 다만 하나, 엄마가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말거라.

사실은 그 무렵에 내가 병원을 좀 다니고 있었어요. 배가 아파서, 무딘 칼로 득득 긁어내는 것도 같고, 예리한 면도날로 한 번에 주욱 그어대는 것도 같고, 송곳으로 콕콕 찌르는 것도 같은 아픔이 너무 견딜 수 없어서, 참을 수 없어서 병원을 갔는데, 그런데 나를 맞아준 의사가 누구였는줄 알아?

세상에, 엄마의 사망진단서에 사인을 한 그 젊은 의사였어요. 기분 참 이상하대요. 세상이 아무리 좁다 해도, 고창이 아무리 작은 읍내라고 해도, 내과의사가 한둘이 아니련만 어째서 하필 그 의사에게 내 배를 내주게 되었을까, 집에 와서 가만 생각해보고 있노라니 새삼 인연이라는 두 음절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 거야. 생과 사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 마디가 그렇게도 맹렬하게 가슴을 콱 쑤시고 들어올 수가 없더라고. 엄마도 알지? 언제인가 텔레비전 보면서 그랬잖여.

“오매 이상스럽네. 내가 노무현 대통령 찍었는디, 참말로 이상스럽네. 으째서 저 사람이 대통령이까?”





와하하,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한참을 그러던 엄마의 표정은 정말이지 압권이었어. 하긴 뭐, 대통령 선거 끝나고 삼 년 뒤에 중증치매 선고를 받았으니까, 그리고 또 한 번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엄마는 아, 음, 뭐 기억을 다 까먹어 버렸으니까, 그러니 그럴 만도 했겠지.

아무튼 그날 의사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웬놈의 술을 그렇게도 많이 마셔댔느냐고. 죽지 못해 환장했느냐고, 허헛 참, ‘새파랗게 젊은 놈’이 말이야. 낫살이나 먹은 나한테 응? 그렇게 마치 자기 이복형이나 대하듯이 건방지게 함부로 말하더라고. 그런데도 밉지가 않고 이뻐 보이는 거 있지. 흐흐, 그래서 내가 ‘그놈’한테 그랬어. 엄마 돌아가신 뒤로 잠도 안 오고, 술을 마시면 자는지 쓰러졌는지 모를 정도로 하여튼 곯아떨어지니까, 그래서 술을 자꾸 마셨다고, 그게 뭐 그렇게 잘못이냐고, 했더니 그 ‘이쁜놈’이 그러더라고.

“입원하세요.”“입원? 안 돼. 개가 새끼도 낳았는데, 밥도 줘야하고, 집에 가야 해.”

“그럼 내일 아침에 물도 마시지 말고 빈속으로 일찍 오세요.”

“응, 그거라면 뭐, 하지요.”

내시경 검사를 해야 한다나 어쩐다나,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일단 주사나 한 대 맞고 가라고, 해서 두 시간 동안 수액주사 하나를 맞았는데 배는 여전히 아픈 거 있지. 이거 혹시 돌팔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 엄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신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밤새 아픈 배를 안고 뒹구는 내 마음이 그리 썩 편하지가 않더라고. 그래도 뭐 어쩌겠어. ‘그놈’이 시키는 대로 아침에 밥도 안 먹고, 목이 하도 타서 물로 입술이나 좀 적시고 그냥 병원으로 갔지.





그런데 무슨 놈의 내시경 검사 대기자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원, 내가 여덟 시에 병원을 갔는데도 벌써 대기 중인 환자가 열 명도 넘는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환자라기보다는 종합검진 받는 사람들이더구만. 연말이라서 그런 검사 받는 사람이 한꺼번에 몰린다는 거야. 그러면서 간호사가 그러더라고.

“하-안참 기다리셔야 하는데, 아이 어쩌죠. 죄송해요. 하필 오늘따라.”

그러는 간호사의 얼굴이, 그 말투가, 그 자태가 참 이뻐 보이데. 누이동생 같고, 제수씨 같고, 또 뭐냐 그, 친구의 아내 같기도 하고 하여튼 내 목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하더라고. 그런 기분인 채로 한 시간 사십 분을 기다렸어.

내시경실에서 푸른 가운을 걸친 간호사가 나오더니 내 이름을 부르고, 이어서 하얀 종이컵 하나를 내밀며 한 번에 쑤욱 들이키세요, 그러는 거야. 내용물을 보니 무슨 백시멘트 반죽 같기도 하고, 찹쌀가루 반죽 같기도 한데 하여튼 마셨더니 으웩, 이게 무슨 맛이냐. 도로 뱉고 싶은 거 있지. 하긴 뭐, 그네들이 나한테 무슨 달콤한 음식을 주었겠어?

또 한 십여 분쯤 기다리니까 이제 됐다고,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조금 으스스하데. 내 몸의 어딘가를 토막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어. 대번에 주눅이 들어서는 그냥 그네들이 하라는 대로 했지. 누워서 엎드리라 해서 그렇게 했고, 엉덩이를 내 놓으라 해서 엉덩이를 내 주었더니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더라고. 주사를 놓았다고 하는데 무슨 주사인지 물어볼 틈도 겨를도 없었어.

주사를 놓고는 다시 모로 누우라고 하데. 시키는 대로 모로 누우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일단 일어났다가 다시 누우려고 하는데 간호사가 그러는 거야.
“아이 참 뭐하는 거예요, 바지는 올리고 해야지. 미쳤어 정말.”

짜증이 살짝 돌고 있는 말 같기도 했지만, 표정을 보니 웃자고 하는 소리 같더라고. 주눅이 들어버린 나는 바지가 내려져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엄벙덤벙 누우려고 했던 건데, 그것을 알아차린 간호사가 내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그런 우스개를 살짝 동원했던 것 같더라고.

왼쪽 다리는 밑에 넣고 오른쪽 다리로 누르는 자세를 취하라, 왼손은 갈비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뒤로 빼고 손바닥으로 갈비를 잡는 자세를 취하라, 등등 내시경실 간호사의 지시가 사뭇 엄격하더라고.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가 싶어서 나는 또 긴장을 했겠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더라고. 내시경이라고 하는, 기다란 막대기가 불을 켠 채로 내 목구멍을 지나 창자 속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게 될 내 육체를 효과적으로 제압한다는, 그런 깊은 뜻이 있었더라고.





하여튼 그렇게 해서 준비가 끝나고, 담당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서고, 그때부터 여기저기 내 몸을 잡는 기척이 느껴지는 거야. 내가 꿈틀거리면 그 손에 악력이 가해져서 나를 꼼짝 못 하게 하고, 내가 다시 가만히 있으면 그 손에 악력이 풀리면서 뭐랄까, 부드럽게 애무하는 뭐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잡고 있는 것 같더라고.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를 계속 하는 거야.

“김간은 연애 안 합니까?”

“아유 선생님은 처제랑 염문이 있는 것 같던데 그러심 안 되죠.”

“우리 이따가 순대 먹으러 가요.”

“요새 감나무에 홍시가 많이 달렸던데 그거 따 먹으러 가면 안 될까요?”

그런 이야기들이 계속 나오는데 글쎄, 이게 뭐라고나 할까, 엄마는 알까? 그들이 왜 그런 수상한 암호문 같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는지? 하여는 나는 그때 그렇더라고. 아니 근데 얘들이 지금 사람 눕혀놓고 뭐 하는 짓들이야, 이거, 장난하나? 연애질하나? 별별 생각이 다 드는 거 있지. 기분도 엄청 나빠지려 하고.

나중에야 알았어. 내가 내 창자 속에서 돌아다니는 그놈의 내시경 때문에 받을 고통과 불쾌감을 덜어주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내 의식을 분산시켜서 아픈지 어쩐지 헷갈리게 하려는 전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어. 물어보고 안 것은 아니야. 그 정도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끝나고 나니 금방 알겠더라고.



# 내복약


그러고 보면 사람의 말이란 참 묘한 거야.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굳이 설명을 듣지 않고서도 이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는 거. 이거 얼마나 감격스런 거냐고. 불교에서 말하는 불립문자란 게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 아니겠어?

아무튼 다시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의사가 그러데. 식도염이 있고, 장염도 심각하고, 십이지장에도 이상이 많고, 등등 뭐라고 계속 ‘지껄이면서’ 사진을 보여주는 거야. 내장이 원래 핑크색으로 보여야 하는데 보랏빛이 많지 않느냐고, 눈이 있으면 보라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느냐’ 뭐 그런 얘기였어.

의사의 그 거친 말투가 나를 위로했다고 하면, 그러면 형용모순이 되겠지만 그때는 어쩐지 고맙데요. 일어서서 고맙다고 어깨라도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갑자기 무슨 동생 같기도 하고, 조카 같아 보이기도 하는 그 젊은 의사의 말을 착실하게 듣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내 몸이 벌써 그렇게 순종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이후 지금까지 보름 동안이나 술은 한 잔도 안마시고 약만 열심히 먹고 있다는, 그런 얘기를 내가 지금 엄마한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난 아무래도 오래 살려나봐. 아버지는 병원에서 술 마시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도 다음날 바로 술을 마셔 버렸다고, 그러면서 엄마가 그때 징글징글하다고 했었는데,

그나저나 엄마, 지금 들려요, 내 말? 안 들려? 말이 없어, 왜.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