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무슨 비구니 스님이 아이를 이렇게도 많이 낳았지?
아니 무슨 비구니 스님이 아이를 이렇게도 많이 낳았지?
  • 승인 2012.01.1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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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두번째


# 은선암이 숨어 있는 산 전경


엄마. 어제는 영광 법성포에 다녀왔어요. 법성포에 도착해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은선암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거길 먼저 다녀오자, 하고 방향을 틀었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비탈길에 눈이 너무 많더라고. 아니 뭐 꼭 눈 때문에 포기했던 것은 아니고, 뭐랄까, 막상 은선암 코앞에 도착하니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그만두고 굴비 구경이나 하다가 돌아왔어요.

은선암이라고, 그 왜 내가 오래 전에 한 번 얘기했었잖아. 오일팔 문학상도 받고 했던 시 쓰는 후배 하나가 가자고 해서 멋모르고 따라나섰다가 그만 머리 깎고 중이 될 뻔했다는 얘기 말이여. 그때 그곳이 비구니 도량이었는데 나중에 사람이 바뀐 뒤로 안 가본 지가 벌써 팔구 년 됐나보네. 백수해안도로 구경 한다고 몇 번이나 은선암 옆구리를 끼고 돌면서도 안 가봤거든.

거기 비구니 스님이 꼭 외할머니를 닮았어요. 아니 어쩌면 실제로는 닮지 않았는데도 내가 처음 보고 대뜸 외할머니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외할머니를 닮았다고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긴 해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게 가끔 그렇잖아요. 그날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아주 좋은 인상을 받기도 하고, 정 반대의 인상을 받기도 하는 것 말이에요.

좋은 인상을 받을 때는 이것저것 아무 것이나 마구 끌어대서 나와의 개인적인 어떤 인연을 찾아내거나 심지어는 만들어내고, 그 가상의 인연을 바탕으로 나와는 각별한 사람이라는 그런 착시현상에 가끔 빠지기도 한다는 거, 그게 인간의 마음이지 않겠는가 하는 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랬어요. 그 비구니 스님을 처음 보던 날 내가 많이 울었어요. 실제로 무슨 통곡을 했다거나 눈물을 마구 흘린 것은 아니고요. 가슴에서 아련한 작은 시냇물이라도 흐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던 거예요.



# 버려진 닻들


그 비구니 스님이 초상집을 많이 다녔대나봐요. 그 왜 영험이라고 하잖아요. 특히 할머니나 아줌마들이 그걸 신용하는 것 같던데 이를테면 특정한 장소에 가서 백일기도를 한다든가, 천일기도를 한다든가,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특정한 인물을 초대해서 뭔가를 봐달라고 하는 그런 심리, 혹은 현상 말이에요. 그 비구니 스님에게도 그런 소문이 붙어 있었대나봐요. 그 양반이 죽은 사람을 만지면, 그러니까 염을 해주면 그 자손들이 잘된다고 하는, 그런 소문 때문에 신도들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그 양반을 부른다는 거예요.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간다, 하는 것은 아마 모든 성직자들의 소명의식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봐야하는 것이겠지요? 그 비구니 스님이 그랬어요.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가곤 했었대나봐요. 그렇게 2박 3일쯤의 나들이를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이면 이상하게도 세 번에 두 번 정도는 거리를 떠도는 아이를 발견하게 되더래요.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다가 한눈을 파는 바람에 잃었거나, 아이 자신이 집 밖으로 나왔다가 어떻게 잘못 돼서 길을 잃었거나 하여튼 방향을 못 잡고 허둥거리며 울고 있는 아이가 비구니 스님의 눈에 그렇게도 자주 발견된다는 거예요. 그때마다 스님은 그 아이를 붙잡고 눈물을 흘려가며 집은 어디냐, 부모는 어떻게 되셨느냐, 등등을 물어보고, 최종적으로 갈 곳이 없구나 하는 판단이 서면 데려와서 함께 살아간다는 거예요.



# 어선마다 부교가 설치되었다


그때 내가 갔던 날도 그랬어요. 다섯 명의 소년 소녀가 있었어요. 가장 나이 많은 애가 열다섯 살이고, 어린애가 다섯 살이었는데 남자아이 둘에 여자애가 셋이었지요. 모두가 하나같이 비구니 스님을 일러 엄마라고 해서, 까닭을 모르는 나는 내심으로 많이 놀라고 있었지요. 아니 무슨 스님이 아이를 이렇게도 많이 낳았나, 해서 말이에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스무 살이 되면 무조건 내보낸다더군요. 스무 살 이전이라도 다른 적절한 인연이 닿으면 길을 찾아서 나가게 된다는데 그렇게 은선암을 거쳐간 아이들이 벌써 열세 명이라고, 그런 말을 하면서 스님이 눈물을 글썽이는 거예요.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좋은 일을 했는데 왜? 그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물어보지를 못하겠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사람이 이게 그렇더라고요. 어떤 일에서는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대답을 듣지 않더라도 그 답을 내가 이미 알아버리고 있는 것, 구차하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고 하면 오히려 미진함이 남는다는 것, 이것이 인생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예술작품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그날 돌아오면서 나는 했더랬지요. 그러자 문득 외할머니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림을 좋아하셨던 외할머니가 생전에 그러셨잖아요. 살아 있는 사람이 예술이라고 말이에요. 그래서인지 외할머니는 단돈 십원짜리 하나도 당신의 재산으로 삼지를 않으셨지요. 무엇이든 당신의 손에 들어오면 이걸 누구에게 줘야하나, 하는 걱정부터 앞세우곤 하셨으니까요.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너무 가난한 외할머니가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면서는 그렇게 상큼하고 깔끔해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 갯벌 위를 미끄럼타는 새


엄마.
엄마의 엄마가 되는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신파적으로 말해서 눈물이 앞을 가리곤 해요. 삼십대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셨다지요. 주위의 재가 권유를 뿌리치고 절간으로 들어가서 공양주 보살이 되셨다지요. 문수사에서 공양간을 맡은 이후 단 하루도 속세간의 안온한 방바닥에 등을 대본 적이 없으셨다지요. 어디서 누가 불러 가셨다가도 반드시 한밤중에라도 절간으로 돌아가셨던, 심지어는 딸네 집에 오셨다가도 언제 가신지도 모르게 가셔 버리곤 했던 외할머니, 그런 외할머니를 선운사에서 보낸 깡패들이 피투성이를 만들어 놓기도 했었지요.

그러고 보면 스님네들의 재물에 대한 욕심과 집착도 상당해요. 내가 아직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거의 문수사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 어린애의 기억만으로도 네다섯 차례 정도는 한밤중에 습격을 받았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독립사찰이었던 문수사는 그렇게 해서 선운사의 부속사찰 즉 말사가 되었지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구요. 덕분에 외할머니는 여기저기 작은 암자들을 떠돌다가 종당에는 당신이 눈을 감을 곳도 없이 딸네 집에 오셔서 슬프게 운명하셨지요.

선하게 좋은 일만 많이 하고 자기 욕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항상 슬픈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는 관념이 내게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일까요. 은선암의 비구니 스님을 생각하면 외할머니가 떠오르고,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은선암의 비구니 스님이 떠오르곤 하는데 그것 참, 그날 법성포에서도 그랬어요. 한 걸음을 떼면 외할머니가, 또 한 걸음을 떼면 비구니 스님이, 그렇게 교차로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거예요.



# 입구가 막힐 정도로 빼곡한 굴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외할머니와 그 비구니 스님을 교차로 생각하며 법성포 여기저기를 걷고 있는데 야아 참, 한눈에도 상쾌하고 산뜻하고 알뜰하고 심지어 살뜰하기까지 한 화장실이 눈에 쏙 들어오더라고요. 얼른 들어갔겠지요? 사실은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오줌도 마려웠던 참이었으니까요. 옛날에는 굴비 사러 법성 갔다가 소변 마려우면 화장실 찾느라 많이도 헤매곤 했는데 이젠 그런 일이 완전 사라졌더라고요.

법성포, 아 참 많이도 변했더라고요. 노점 좌판이 늘어서 있던 앞쪽의 갯벌은 죄다 매립되어서 택지조성이 되었는데 아직 건물은 없고 자동차 운전 연습 하는 사람들이나 찾는 것 같았어요. 칠산 앞바다 쪽으로도 매립이 되어서 건물이 쭉 늘어섰고, 완전히 현대식 시장 꼴을 갖추었더라고요.

사 년 전인가, 오 년 전인가, 그때만 해도 사람 냄새가 폴폴 풍겼댔는데, 지금은 사람이 있으되 사람 냄새보다는 돈 냄새가 더 나더라고.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예전에는 가게와 가게가 그야말로 이웃처럼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멀찍멀찍 떨어져 있다는 거, 그래서 물건을 많이 진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 상인들은 그게 좋겠지만, 오랜만에 향수병처럼 생각없이 길을 나선 사람에게는 뭐랄까, 뜨악하달까, 그런 거였으니 결국 내 잘못이라고 해야겠지요.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은 것을 찾고 있었으니 이게 뭐야.



# 돗자리를 연상케 하는 굴비두름


그 대신 어부들의 작업환경은 많이 좋아졌더라고요. 그물 같은 어구를 야적할 공간도 충분하고, 무엇보다 선박이 있는 곳마다 철제 부교가 설치되어 물이 들어오면 올라가고 물이 나가면 내려가고, 그래서 어부들이 언제라도 자유롭게 선박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는데 어로작업에 무식한 내가 볼 때는 썩 좋아 보이더라고요.

‘미친년 엉덩짝’만큼이나 남은 가난한 갯벌에서는 오리일까 기러기일까, 갈매기는 분명 아닌, 오리도 같고 기러기 같기도 한 날것들이 질척거리는 갯벌 위를 마치 썰매라도 타듯이 미끄러지며 뭔가를 찾아 먹고 있어서 가까이 가 보려고 하면 퍼득 날아가 버리고, 날아가 버리고 하는데 그것 참, 저기 다산초당 앞에 강진만 갯벌에서 조개잡이 하는 아줌마들을 연상케 하더라고요.

하긴 강진뿐이 아니라 남도의 갯벌에서는 대개들 그렇게 썰매 같은 것을 타고 다니며 조개잡이를 하더만. 고창에서는 죽었다가 깨나도 볼 수 없는 풍경이여. 남도 갯벌에 대면 고창의 갯벌은 갯벌이 아니라 모래밭에 흙이 좀 섞였다고나 할까요.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으면 발이 서서히 묻혀 들어가기는 하지만 걸어 다니고 있는 한에서는 발등에 흙 묻을 일이라고는 어쩌다 실수로 넘어졌을 때나 가능할 정도니까 뭐.



# 노란 배 모양의 화장실


갯벌 여기저기에 박힌 못 쓰는 닻들, 그것은 언제 봐도 애련한 향수 같은 것을 불러대는데 요번에는 겨울이라서인지 더하대요. 그 애잔한 느낌이, 한정 없이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은 착시 내지는 환각 같은 것들이 자꾸 일어나더라고요.  

가게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널려 있는 조기, 조기, 멀리서 보면 무슨 돗자리를 연상케 하는 조기두름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옛 시절의 어떤 하루가 생각나데요. 황새기 젓보다는 조금 큰, 전라도에서는 ‘황숭어리’라 해서 무 숭숭 썰어 넣고 국을 끓이면 시원해서 그 맛이 유별난, 조기급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작은 조기새끼를 한 상자 사다 놓고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큰 것을 고르고 또 골라서 짚으로 엮어 설 명절에, 그리고 또 제사 때 쓴다고 쭈그리고 앉아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던 엄마의 모습, 참으로 까마득한 옛날 옛적 같은, 그러나 숫자를 헤아려보면 기껏 삼사십 년밖에 안 된 그 시절의 엄마가 자꾸 떠오르고 있었어요.

이제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였던, 그러니까 중년의 엄마, 그 시절의 엄마는 참으로 곤궁한 살림을 살고 있었으면서도 마음 넓이는 겁나게도 광활했었지요. 아끼고, 또 아껴서 크게 쓰는 재미를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마을 이장 노릇 하는 재미에 한껏 취해있는 아버지를 찾아오는 그 많은 손님들을 하나도 그냥 보내지 않고 밥을 해 대었던, 아이들 소풍 가는 날이면 십원이나 혹은 이십 원을 주면서 “절반은 너 사탕 사 먹고 절반은 선생님 담배 사 드려야 헌다 잉?”하셨던 엄마의 그 시절, 그 목소리가 영광 칠산 앞바다를 무연히 바라보고 있는 내 귓속에 들리더라고.



# 갯벌을 매립한 택지


손해를 보면서도 손해 본다는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그런 쪽으로는 생각머리를 돌리지 않았던 엄마, 눈앞의 일시적인 손해가 궁극적으로는 크게 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일종의 지혜 같은 것을 엄마는 자식들에 반면교사로써 심어주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우리 형제들은 대체로 돈에 그리 크게 연연하지 않는, 뭐랄까, 가난하면서도 가난 때문에 어디 가서 주눅은 들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그게 큰 약점이 되어 있어 버리더라고.
세상의 모든 아내나 혹은 남편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고, 우리 형제도 또한 모두가 다 그런 배우자를 맞이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는 그런 경향이 있어 버렸달까, 돈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는, 그 싸움이 형제간의 불화로까지 이어지고, 그런 불화가 엄마와의 거리감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을 보면서 엄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선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글쎄, 눈물 같은 것이 막 나오려고 하데요.

외할머니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돈이 많은 곳에서는 절대로 예술 같은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가능할 수가 없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하루였으니 아주 유익한 여행이었다고, 그런 말을 엄마에게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했던 거예요, 잘 했지요, 나?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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