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사라져가는 추억의 ‘동네 이발관’을 찾아서-5> 종로구 통인동 유명이용원

낡은 흑백사진 같은 풍경. 손잡이를 당기면 뒤로 눕혀지는 낡고 묵직한 의자의 팔걸이에는 키 작은 아이들을 위한 널빤지가 놓여있고, 의자 앞으로는 손때 묻은 바리캉이며 가위며 알루미늄 빗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날이 접히는 옛날 면도기 옆에는 비누거품을 내는 플라스틱 컵이, 그 옆으로는 면도날 갈 때 쓰는 닳아빠진 가죽 허리띠가 매달려 있다. 사라져가는 것들이 어디 이 뿐일까 만은, 이렇듯 작고 초라하고 잊히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낡은 이발소가 품고 있는 진한 추억의 향기를 세련된 미용실이 흉내 낼 순 없기 때문이다. 1895년(고종 32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 단발령이 시행된 뒤, 왕실 최초의 이발사 안종호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이발의 역사. 하지만 그로부터 120여년이 지난 도심에서 이발관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용실의 득세로 70~80년대 호황을 누리던 이발관은 이제 주택가가 밀집한 동네 후미진 구석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어쩌다 찾아보려 하면 퇴폐업소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이발관 보다는 미용실을 찾는 게 대세다.
하지만 오랜 시간 명맥을 유지하는, 그야말로 ‘진국’인 이발관들도 있다. 흔히 이발관은 해당 동네의 역사와 함께 한다. 수십년간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다 보니 동네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 <위클리서울>은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초지일관 자리를 지켜온 이발관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이번 호엔 그 다섯 번째로 청와대 인근 종로구 통인동에 자리한 ‘유명이용원’을 찾았다.




누구나 ‘효자동 이발사’ 꿈꾸지만…

기자가 이발관에 들어서자 사장 임배훈(59) 씨는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청와대 인근이라는 중압감 때문인지 말을 아꼈다. 

“인근에 이발관이 3곳 있어요. 자연히 청와대 직원들도 자주 찾죠. 경호팀, 비서실 직원 할 것 없이 찾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발을 담당했던 ‘효자동 이발사’의 이발관은 사라진지 오래다. 임 씨는 이발사라면 누구나 ‘효자동 이발사’를 꿈꾸지 않겠느냐고 했다.

“요즘은 누가 대통령 이발을 하는지 조건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들리는 얘기로는 청와대로 들어가는 길은 여전히 까다롭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면도할 때 이중삼중으로 경호가 붙는다는 얘기도 있고….”





“청와대 직원들이 대통령에 대해선 어떤 말을 하느냐”는 질문에 임 씨는 “그들은 별 말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임 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기자의 질문에 불편한 기색이던 임 씨는 이발사들의 과거에 대해 묻자, 작심한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63년에 이발사 자격증을 손에 넣었으니, 임 씨의 정규 이발사 경력은 정확히 50년이다.     

“머리 깎는 기술이라… 요즘은 이런 얘길 하면 믿질 않겠지만 예전엔 돈을 쥐어줘 가면서 배웠어요. 당시 이발소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쌀 한말에 200~300원하던 시절에 몇 천원씩 돈을 내가면서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힘들었던 점은 오전 6시부터 밤 9시까지 줄곧 서 있는 것이었죠. 그것만 빼면 특별히 힘든 것은 없었어요.”

당시 사람들이 그토록 이발 기술을 배우고 싶어 했던 가장 이유는 밥벌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60년대 당시 소규모 이발관은 대부분 40~50원, 큰 이발관은 160원을 이발비로 받았다. 이발사 일당은 200~250원이었다. 말단 공무원 봉급이 7000~8000원 정도 됐으니 이발사도 그에 맞먹는 봉급을 받은 셈이다. 





“그때 이발사 기술은 밥 벌어먹는 기술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기술이었지요. 일단 취직만 하게 되면 손님을 평생 받을 수 있는 것이죠. 사람 머리라는 게 계속 자라니까 언젠가는 깎아야 하잖아요. 일감이 떨어질 일은 없었지요.”

이발사는 60년대만 해도 세탁·사진·양복 분야와 더불어 미래가 보장되는 기술직으로 누구나 선망했다. 이발관에서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발사’, 머리를 감기는 ‘세발사’, 고대기를 사용하는 ‘시아게사’, ‘면도사’ 등이 분업화해 일했다.

미용실도 없던 시절이었다. 남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주부들도 연탄불에 달궈진 꼬챙이로 머리모양을 만들었던 소위 ‘불고대’를 하기 위해 이발소로 향했다. 하루에 한명만 깎아도 쌀 1되 값은 벌 수 있었다고 하니 비록 큰 부자가 되지는 못할망정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반년이 넘도록 남의 머리만 감겼으니까….”

임 씨는 머리 감기기, 면도, 불고대 기술 등을 차례로 배웠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아 치우고 손님들의 머리를 감겨주는 일이었다. 예전엔 빨래비누로 머리를 감기기도 했다. 바리캉과 가위를 잡는 기술이 가장 마지막 단계였다.

“화학성분이 적기 때문인지 머리카락도 덜 빠지고 마지막 물기를 훔칠 때 손에서의 감촉이 다르죠. 믿기지 않겠지만 이발소로 머리 손질하러 올 때까지 거의 한 달이 넘도록 머리를 감지 않는 손님들도 적지 않았어요. 일반 세숫비누로는 때가 잘 지지 않아 빨래비누로 빨래하듯이 머리를 감겨주었기 때문에 ‘머리를 빤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죠.”



“눈 보이는데 가위 왜 놓아?”

임 씨는 지금도 자신의 첫 번째 손님을 잊을 수가 없단다. 그렇게 연습을 거듭했건만 막상 실전에 투입된 손은 마음과는 달리 요동을 쳤고, 결국 손님의 머리 한쪽을 가위로 파먹어 버린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스포츠머리’라고 해야 할까요. 결국 돈도 안 받고 짧게 자를 수밖에 없었죠.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당시엔 다들 장발 스타일을 고집했으니까요.”

임 씨는 이후 사람 몸에 가위를 대는 자신의 소임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성질 급한 사람은 가위를 들지 않는 편이 좋아요. 보통 한사람의 머리를 손질하고 염색까지 하는데 1시간 쯤 걸리거든요. 느긋한 마음가짐은 이발사의 필수 덕목이죠.”





한때는 50여 명을 이발하고 나면 손목이 시리고 다리 관절이 아팠다. 요즘은 그 시절이 때론 그립기도 하다. ‘아이롱 파마’를 하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오거나 온양에서 오는 손님도 있다. 30~40년 된 낡은 고대기를 팔라는 사람도 가끔 찾아온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바빴어요. 동대문에서 면도사, 세발사를 거느리고 일했죠. 하루에 손님이 40~50명 정도 됐으니까요. 예전엔 새벽 5~6시에 문을 열었지만 요즘은 7시 30분쯤 시작해요.”

올해로 경력 50년째. 흰 셔츠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이발관은 얼핏 허름해 보였으나 임 씨는 자존심이 강해 보였다. 그는 “미니스커트에 두꺼운 대학 서적 몇 권을 끼고 콧대 높이던 여대생도 예전엔 이발관에서 커트했다”고 했다.





“요즘 남자들은 속도 없지, 왜 미용실을 들락거리는지…. 전기기계 들고 하는 거랑 가위로 깎는 것은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이발은 예술입니다.”

임 씨는 큰 욕심이 없다고 했다. ‘효자동 이발사’처럼 청와대 입성을 기대한 적도 없다. 지금 자신의 이발관을 찾는 손님들 머리 만지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오늘따라 손님이 없네요. 평소엔 장사가 잘 되는 편입니다. 먹고 사는데 큰 지장도 없고요. 청와대 직원들도 직원이지만, 동네 단골들도 많거든요. 여기서 문을 연지는 10년 밖에 안 됐는데, 동네가 고즈넉해서인지 의외로 이발관을 찾는 손님이 많아요. 물론 연세가 드신 분들이죠.”





80년대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손님이 찾아와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발관은 동네의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모여 TV를 시청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동네 사랑방 역할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임 씨네 이발관은 그럼에도 매출액이 적지 않다. 

“경기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발소에 두 번 올 것도 한번으로 줄이려고 해요. 매상이 오를 때가 기쁘긴 하지만, 사실 그것도 손님들과의 대화가 수반돼야 진정한 기쁨이죠. 매상이 줄어서가 아니라, 대화가 줄어서 아쉬운 겁니다. 그래도 친구들은 정년퇴직해 집에서 놀고 있지만, 저는 용돈벌이라도 하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눈이 보일 때까지는 가위를 놓지 않을 겁니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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