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10 - 연산군 묘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연산군의 묘를 찾아가봤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 등이 재평가에 불을 붙인 이후 2006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된 곳입니다.




# `연산군묘`는 2006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됐지만 다른 왕릉에 비해선 초라하다.


살아서 실패한 왕은 죽어서도 서글프다.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과정에서도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는 제외됐다. 반정으로 인해 `폐위`된 왕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무덤인 `능`과 세자의 무덤을 칭하는 `원`보다 낮은 게 바로 `묘`라는 칭호다.

한 때 방치 수준으로까지 전락했던 연산군 묘가 제대로 된 관리를 받은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사적 제362호로 지정된 것도 1991년 10월 25일에 이르러서였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2006년부터다. 영화 <왕의 남자> 등이 나오면서 연산군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던 게 계기가 됐다. 지금은 소재지인 서울시 도봉구의 `관광명소`로 지정될 만큼 대우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인근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주민은 "예전엔 비석도 나뒹굴고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아이들이 묘 주변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한쪽엔 쓰레기와 연탄재가 쌓여있기 일쑤였다"며 "설사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도 `폭군`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는 또 다른 주민도 지난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예전 이 곳을 지나 등하교를 했는데 볼 일이 급하면 실례도 하고 그랬다. 몇몇 친구들은 인적이 드문 이 곳 주위에 모여 담배도 피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TV에서 연산군 묘라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예전엔 폐허였는데…"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인 연산군(1476-1506)과 왕비인 신씨(1472-1537)가 안장된 연산군묘(사적 제362호)는 서울시 북쪽 외곽인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엔 태능관리소에서 관리했지만 전면 개방하면서 정릉관리소로 책임이 이관됐다.





# 연산군 묘비



지하철 4호선 쌍문역에서 130번 버스를 타거나 1, 4호선 창동역에서 1161번, 1144번을 이용하면 가까운 곳에서 하차할 수 있다.

정류장에서 내리면 잘 가꿔진 묘소가 큰 길 바로 옆에 조성돼 있다. 차를 타고 지나는 사람들이 대충 지리만 파악하고 `연산군 묘`로 잘못 판단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양효공 안맹담(1415-1462)과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1477)의 묘(서울시 유형문화재 50호)다.

안맹담의 본관은 죽산으로 함길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의 아들이다. 정의공주와 결혼했는데 부부의 금실이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 이름이 높던 양효공은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했다.
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거북이 모양의 신도비가 세워졌다. 정인지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인 안효세가 비문의 글씨를 썼다.








# 세종대왕의 딸인 정의공주 묘(사진 위)와 신도비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뒤를 돌아 큰길을 건너면 멀리 `연산옥`이라는 대형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 불과 몇 년만에 바뀐 연산군의 위상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상당한 굵기의 은행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얼마전까지 이 곳에 자리잡고 있던 무속인들의 간판은 정비사업 때문인지 자취를 감췄다.





#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때문인지 `연산옥`이란 음식점도 생겨났다.


연산군 묘 앞쪽에 있는 방학동 은행나무는 높이 24m, 둘레 9.6m로 수령이 800년에서 1000년 사이로 추정된다. 연산군 묘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그 모습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오래 전부터 신성시했다고 한다.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변이 생겼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일 년 전에도 화재가 나 소방차가 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은행나무


은행나무 옆엔 `원당샘` 터가 남아있다. 600년 전 파평 윤씨 일가가 이 곳에 자연부락을 형성한 이래 수백 년간 생활용수를 공급했는데 마을 이름을 따 `원당샘` 혹은 `피앙우물`로 불렸다. 일정한 수량과 수온을 늘 유지해 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방학동 은행나무`의 장수 원인을 이 곳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무속행위 금지` 문구와 `식수 사용 불가`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 `원당샘` 터

비운의 `신수근 가문`

은행나무와 원당샘을 앞에 둔 연산군묘는 500년 가까이 사람들의 기억속에 묻혀있었다. 한 때 절대 군주의 자리에서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던 연산군이었지만 반정에 의해 밀려난 폐주였기에 역사 기록 또한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개방된 묘역은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곤 자유 관람이 가능하며 전문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다.

중종 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유배지인 강화도 교동으로 옮겨간 지 두달여 만에 병사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질`이나 `화병` 등이 얘기되고 있지만 정황상 `독살설`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연산군은 죽은 지 7년 만에 부인 신씨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방학동으로 이장됐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연산군의 이미지는 `폭군` 이었지만 신씨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이 높아 연산군 묘역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교롭게도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첫째 부인 역시 신씨 집안이었는데 바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다.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던 신수근은 연산군 폐위 제의를 거절한 뒤 반정세력들에게 결국 죽임을 당했다. 반정의 주역 박원종은 당시 신수근에게 "누이가 중요하냐, 딸이 중요하냐"고 마음을 떠보았다고 한다.

이후 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이 단경왕후를 그대로 뒀을 리 만무하다. 단경왕후는 왕비에 즉위한 지 며칠 만에 결국 폐위 당했다. 하지만 단경왕후를 사랑했던 중종은 틈만 나면 신씨의 친정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씨 집안에서 그 곳에 빨간 치마를 걸어두었다고 하는데 인왕산 `치마바위`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됐다.





# 인왕산 `치마바위`



`태종의 여자` 의정궁주

연산군 묘역에 있는 묘는 모두 5개다. 가장 위쪽으로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가 나란히 있고 가운데에 의정궁주 조씨묘가 있다. 맨 밑에 있는 두 개는 사위인 구문경과 딸의 묘다.




# 연산군묘 배치도





# 연산군묘역엔 5개의 묘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의정궁주`의 존재에 대한 것이다. 보통 궁주는 왕과 살을 섞은 여자, 즉 왕비가 아닌 `왕의 여자`를 뜻한다.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정궁주를 연산군의 둘째 부인 정도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탁본과 기록 분석 등을 통해 의정궁주가 오히려 연산군보다 앞선 인물임이 드러났다. 의정궁주는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이 나이가 들어 적적해지자 세종이 몇몇 신하들의 딸에게 `금혼령`을 내린 뒤 간택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게 된 의정궁주는 `궁인`으로 계속 궁궐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묘의 생김새를 봤을 때도 의정궁주의 묘가 가장 먼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왕릉을 비롯 대부분의 묘들은 간소한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의정궁주의 묘는 연산군 부부와 달리 묘 하부 주위를 돌로 쌓았다. 이는 조선 이전의 양식이 반영된 것이다. 의정궁주 묘 앞에 있는 문인석도 일반 문인석과는 다른 느낌이다. 어떤 이들은 "환관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 연산군의 문인석(사진 위)과 의정궁주의 문인석은 분위기가 다르다.



연산군 묘역은 능성 구씨 선영에 있다. 하지만 원래 방학동과 양주 일대는 왕족인 전주 이씨의 것이었다. 폐위 전 연산군이 사위인 구문경에게 이 지역을 하사하면서 구씨 집안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한다. 연산군의 딸인 휘순공주의 묘비엔 `전주 이씨`라고 적혀 있다.

연산군 묘는 기본적으로 왕릉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묘를 둘러싸고 있는 담인 곡장과 망주석, 비석, 상석, 장명등, 향로석은 있지만 무인석과 돌호랑이 등 동물 석상은 없다. 제사를 지내는 정자와 입구가 시작되는 홍실문도 빠져있다.









# 연산군묘 풍경들


연산군묘 관계자는 이와 관련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도 풍수리지에 상당한 신경을 썼던 우리 조상들이다. 그런데 연산군 묘의 경우 망주석 위치가 다른 왕릉과 조금 다르다. 뭔가 복이 새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그나마 남향이어서 한겨울에도 볕은 잘 드는 곳이다"고 말했다.

연산군은 젊은 시절만 해도 효성이 지극하고 서예와 시에 능한 총명한 인물로 실록에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연산군 일기>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패자의 역사임을 감안한다 해도 백성의 신망을 잃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50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며 연산군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초겨울 마지막 남은 낙엽들이 묘 주변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 연산군묘에서 바라본 앞쪽 풍경. 은행나무 뒤로 아파트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김승현 기자<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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