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손대면 벼락 맞아 죽는다”
“함부로 손대면 벼락 맞아 죽는다”
  • 승인 2012.02.0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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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만석보


새로운 고부군수로 임명된 박원명은 농민군 우두머리들을 만나 농민들의 요구 사항을 시정하겠다는 약속과 아울러 지금 해산하면 그 누구도 책임을 물어 처벌하지 않겠다고 적극적으로 설득을 하게 됩니다. 백성 알기를 벌레보다도 못하게 생각했던 당시 관리들의 태도와는 달리 성의 있게 설득하는 군수의 태도와 악질 군수 조병갑을 몰아냈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하나 둘 해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안핵사 이용태는 고부 농민들이 해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역졸 800명을 이끌고 고부로 들어와 진상조사를 한답시고 군수 박원명이 약속한 내용을 뒤집어엎고 주모자를 찾아내라고 위협하며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구타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부녀자를 강간하는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군수보다 부사라는 벼슬이 높아서 그런지 이용태의 착취 수단은 어디로 보나 조병갑보다 한 수 더 위였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전봉준은 전라도 무장(현, 고창군 무장면)에 있었습니다. 말목장터에서 농민들의 해산을 만류하던 그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인근 민가에 무기를 분산시켜 감춰놓고 무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무장에는 전라도 내 최대 동학조직을 이끌었던 손화중이 있었고 그래서 재차 봉기를 위해서는 손화중의 도움이 필수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기상조라 머뭇거렸던 손화중도 고부의 참상이 전해지자 함께 봉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요. 이들은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폭정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한다〔제폭구민=除暴救民〕’는 내용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보국안민=輔國安民〕’는 기치로 사발통문을 돌려 분연히 일어서 주기를 호소하였습니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과 손화중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의 이름은 정식(正植) 자는 화중(華仲, 化中) 호는 초산(楚山) 본관은 밀양으로 1861년 6월 22일 정읍군 정주읍 과교리(현 정읍시 과교동)에서 아버지 손호열(孫浩烈)과 어머니 평강(平康) 채(蔡)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임진란에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긴 태인 출신 한계(寒溪) 손홍록(孫弘祿)의 후예이기도 합니다.

동학입교의 연유는 처남 유용수와 함께 경상도 청학동으로 승지(勝地)를 찾아갔다가 때마침 경상도에서 요원의 불꽃처럼 퍼져 나가고 있던 동학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입교 2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포교에 전력하였는데 처음에는 부안에서 포교하다가 그후 정읍으로 옮겨 농소동에서도 잠깐 머물렀으나 다시 입암면 신면리로 옮겼습니다. 이는 당시 동학이 불법으로 지목된 탓이었습니다.

그후 얼마동안 정읍 음성리의 본가로 돌아왔다가 본거지를 무장현으로 옮겨 무장읍 김00의 집에 잠시 포교소(布敎所)를 두었다가, 다시 이웃 무장면 덕림리 양실마을로 옮겨 포교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이 무렵 손화중은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에서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검단대사(黔丹大師)의 비결록(秘訣錄)을 꺼냈다 해서 범상치 않은 인물로 알려져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손화중의 동학조직으로 들어갔다고 전합니다. 그 얘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솔암 옆에 높이 30~40미터 정도의 절벽이 있는데 선운사를 창건했다는 검단선사가 그곳에 20여 미터 높이로 석불을 음각해 놓았는데, “도솔암 석불 배꼽에는 앞일을 내다볼 수 있는 비결과 함께 벼락살을 묻어놓아 함부로 거기에 손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 는 것이었지요.

세월이 흘러 1820년 전라감사로 있던 이서구(李書九)가 관할 지역을 순시하던 중 마애불의 배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대목만 언뜻 보고 도로 넣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져 더욱 신비감을 더했습니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일년 전인 1892년 어느날 전봉준, 김개남과 더불어 갑오농민혁명을 주도했던 손화중(孫和仲)의 집에서는 그 비결을 꺼내보자는 말이 나왔답니다. 당시 세간에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답니다.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는 썩은 나라가 빨리 망하기를 바라는 민심이 만든 이야기였지요.

그래서 모두들 벼락살을 걱정했지만 오하영이라는 도인이 말하기를 “이서구가 열었을 때 이미 벼락을 쳤으므로 벼락살은 없어졌다”고 했답니다. 동학교도들은 석불의 배꼽을 깨고 비결을 꺼냈고, 이 일로 각지의 동학도 수백 명이 잡혀 들어가 문초를 받았고 결국 주모자 세 명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당시 미륵비결을 꺼낸 현장에 있었던 동학교도 오지영이 쓴 ‘동학사’ 에 자세히 기록하여 전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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