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마을 뒤론 학들이 도도히 날아다니고…
은행마을 뒤론 학들이 도도히 날아다니고…
  • 승인 2012.02.1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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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역사 현장 탐방 13 - 중계동 '학도암'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명성왕후가 위기의 순간 몸을 피했던 서울 중계동의 `학도암`을 찾아가봤습니다. 주위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학이 이 곳에서 노닐었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 서울시 중계동 은행사거리 인근, 불암산 자락에 있는 `학도암`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은행사거리.

이 곳 일대가 `은행마을`로 불려왔던 건 당연히 은행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중계동 61-22번지에 위치한 수령 800년 가까운 은행나무가 그 연륜을 전하고 있다. 높이 26m, 둘레 6.5m의 이 은행나무는 `구룽대감`으로 불리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지금 `은행사거리`가 유명해진 건 이런 이유가 아니다. `은행`이 갖는 또 다른 의미처럼 돈이, 특히 사교육비가 이 곳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사거리 일대는 `강북의 대치동`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사교육 현실을 보여주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까이는 인근 도봉구와 중랑구에서, 멀리는 구리시에서까지 학생들이 방과 후 학원수업을 받기 위해 찾아온다.

인근 주민은 이 곳 일대가 사교육 1번지로 변모한 데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중랑천을 끼고 교통이 좋은 곳엔 서민들을 위한 주공아파트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보다 접근이 불편한 중계동 일대엔 평수가 넓은 민영아파트가 들어섰는데 상가를 세우려고 하니 마땅히 할 게 없었다. 일단 소득수준이 되는 곳이니 관할 구청에서 생각한 게 바로 `학원가`였다. 저렴한 임대비를 무기로 학원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나름 노하우와 경쟁력이 생기고, 언론도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급부상했다."

수령 800년 `구룽대감`

불암산 자락과 맞붙어 있는 중계동 일대는 몇 십년 전만 해도 서울 동북부 중랑천 주변, 그리고 노원구 일대에서도 한적한 곳으로 꼽혔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직도 조금만 발품을 팔면 아파트 주변에 숨어 있는 밭과 나무군들을 만날 수 있다.




# 산책길 옆 `배밭`


조선 말 명성왕후의 사연이 깃들어 있는 `학도암`도 이 곳이 불과 100여년전만 해도 몸을 숨길 수 있을만큼 한적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학생들로 북적거리는 은행사거리에서 20∼30분 정도만 걸으면 찾을 수 있다.

지하철 교통은 비교적 불편해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지선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청량리역환승센터에서 1224번을 타거나 지하철 7호선 먹골역에서 중계1동주민센터 정류장으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은행사거리 다음 버스 정류장이 중계1동주민센터다.




# 초라한 `학도암 표지판`


정류장에서 영신여고 쪽으로 걷다보면 아파트 뒤쪽으로 불암산의 위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노원문화예술회관과 불암초등학교 사이 도로가 갈라지는 지점에 `학도암` 표지판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중계약국오거리 사거리에서 헤어뱅크 미용실쪽(왼쪽)으로 꺾어지면 서울노원교회로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배밭을 따라 이어진 교회 옆 샛길이 `학도암`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여기서부턴 경사가 다소 가파르지만 10분 정도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괜찮은 산책로기도 하다.




# 평온해 보이는 산책길

코 크고 입 작은 `부처상`

중계동 산 3번지에 위치한 `학도암`은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 무공화상이 불암산에 있던 예절을 이 곳으로 옮겨 창건했다고 한다. `학도암`이라는 이름은 주위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학이 이 곳에서 날아와 노닐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은행나무가 많은 마을 뒤로 학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치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지닌 곳 아니었을까.

이후 학도암은 1878년(고종 2) 벽운화상이 중창하고 1885년(고종 22) 벽운화상이 화승인 경선화상을 불러와 탱화 6점을 그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전쟁 때 모든 건물이 소실됐고 1965년 재창건됐다.








# 학도암 풍경들


그런 만큼 현재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목조건물 위주의 큰 절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멀리서 보면 배트민턴장이나 족구장처럼 보이는 곳에 부처님 상이 모셔져 있다. 그 옆으론 거북이 모양의 약수터가 찾는 이들에게 시원한 약수를 선물한다.




# 학도암 약수터



예전 모습이 사라진 학도암이 그나마 `역사적 가치`를 평가받는 것은 대웅전 뒤편 암벽에 높이 13.4m, 폭 7m의 거대한 마애선각관음보살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4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1기의 석등과 배례석을 앞에 두고 자연암벽을 깎아 그 위에 선으로 새겼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마애불 중 하나다.

관음상은 10개의 이중연꽃으로 만든 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얼굴 크기에 비해 백호(부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점처럼 보이는 터럭)가 유난히 큰 게 특징이다. 눈은 가늘고 코는 유난히 큼직하고 입은 작게 표현했다.








# 암벽에 새겨진 `마애선각관음보살좌상`. 이 곳에 몸을 숨겼던 명성왕후가 시주했다.





# 추운 날씨에도 불공을 드리는 신도


임오군란으로 피신한 명성왕후가 이 곳에서 기도해 효험을 본 뒤 시주해 1872년 건립했다고 한다. 지금도 불신도 중에서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바위 옆면엔 50자로 된 조성명문이 남아 있다. 관음상 옆 지하동굴 같은 `약사전`도 찾는 이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 학도암 약사전


조공 모아놓은 `납대울`

`학도암`에서 내려오면 은행마을과 붙어 있는 곳이 `납대울`이다. 이 곳은 조선 중종과 선조 때의 문신인 윤두수가 살았던 마을로 유명하다. 윤두수는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난 뒤 어영대장과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임명됐으며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난국을 수습한 인물이다. 이중호와 이황의 문인이었던 윤두수는 후에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탄핵으로 물러났다. 저서로는 <오음유고>, <기자지> 등이 있다. 마을 이름인 `납대울`이란 명칭은 조정에 바치는 조공을 모아 놓은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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