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쪽이 죽든지 결단이 나야지”
“어느쪽이 죽든지 결단이 나야지”
  • 승인 2012.02.2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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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한편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양호 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 병정 800명과 신식무기를 주어 전함에 태워 군산항으로 파견했습니다. 마침내 갑오년 4월 초, 전라감영군과 보부상군 2300여 명은 총을 쏘아대는 호기를 부리면서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며 고부로 진격해왔습니다. 백성들은 “난리가 났다. 아무튼 잘되었다. 어느 쪽이 죽든지 어서 결단이 나야지” 하면서 숨을 죽였지요.

며칠이 지나 전라도 태인 화호 나룻가에 달하자 진을 치고 백산을 향해 총을 쏘아대니 이 곳 지형에 익숙한 농민군은 이들을 정읍군 덕천면의 황토재로 유인하여, 그 앞쪽에 위치한 사시봉에 진을 쳤습니다. 한편 농민군 진영에서는 건장하고 용기 있는 자 수십 명을 뽑아 무장(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보부상으로 가장시켜 순창 보부상군의 뒤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4월 6일 밤 어둠을 틈타 농민군 진지를 공격하려는 작전회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관군과 보부상군은 서로 앞장서기를 미루게 되자 무장 보부상군으로 가장한 농민군들이 선발대되기를 자처하여 4월 7일 새벽에 마침 안개가 짙게 깔린 사시봉을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선발대 뒤를 따른 관군과 보부상 연합군은 농민군을 우습게 여겨 서로 공을 세우려고 앞을 다투었습니다.

이때 동학농민군의 진지는 이미 비운 상태에서 사방 주위 숲에 매복해 있어 관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군이 동학농민군의 진지를 급습한 순간 사방에서 매복해있던 농민군들이 일시에 공격하니 이겼다고 방심하고 있던 관군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으니 농민군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뒤를 쫓아 황토현에 있던 관군의 진마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농민군이 처음으로 관군과 맞붙어서 큰 승리를 거둔 황토재 전투랍니다.

전투가 끝난 후 관군의 시체는 황토재 주변 논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그들의 규율이 형편없었음을 말해주듯 주머니는 오는 길에 약탈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전사자 중에는 남자로 변장한 여자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습니다. 황토현은 농민군과 관군사이의 최초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자 농민군 최대의 승전지랍니다.

현재 황토현은 높이 35.5 m 의 낮은 언덕으로 정읍시 이평면 남쪽 덕천면으로 가는 705번 국도에 있습니다. ‘황토현’에서 황토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런 진흙을 말하며 현(峴)은 한자어로 낮은 고개나 구릉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황토현’은 문자 그대로 황토로 이루어진 언덕이란 의미이며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지명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는 ‘황토현’하면 이곳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지요. 이는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서 황토현이 지니는 역사적, 상징적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역사적 의미가 담겨진 곳이기에 역대 정권은 이곳을 자신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이용하기도 하였답니다. 먼저 황토현 정상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기리는 최초의 탑이라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박정희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불법 군사 반란을 자행하여 이 나라의 헌법을 유린하고 정부를 전복했던 자입니다. 이승만과 친일세력들로 구성된 자유당의 독재 정권에 맞서 순수한 젊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4.19 민주혁명을 성공시킨 지 불과 1년 만에 민주주의의 꽃이 채 피기도 전에 이를 압살시켜버린 5.16 군사 쿠데타는 박정희 등 정치군인들이 권력욕에 사로잡혀 일으킨 사건으로 민주화의 후퇴이며 민족사의 실패이고 민족의 통탄스러운 슬픈 사건인 것입니다.

이렇듯 정의롭지 못한 군사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1963년 10월 3일 개천절을 기해 황토현에서 가진 갑오동학혁명기념 탑제막식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혁명은 단 2번 있었을 뿐이다. 첫 번째가 동학혁명이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5.16혁명이 그 2번째이다’ 라고 축사를 했답니다. 이때부터 국사교과서의 ‘동학난’이란 용어는 사라지고 하루아침에 ‘동학혁명’으로 승격(?)되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 ‘천황’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혈서를 쓰고 왜군 장교가 되었고 제 나라 독립군을 토벌, 학살했던 황국군의 장교였지 않습니까? 그의 과거의 반민족적인 죄 만이 아니라 해방 후에 한국군 장교로 변신하고 불법 군사 쿠데타를 자행한 후에 체육관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간 자이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기분이 좋으면 일본 장교복을 입고 ‘갓데 구로소또 이사마시꾸!’(‘이기고 돌아오니 장하도다!’란 뜻)인지 뭔지로 시작되는 일본 군가를 즐겨 불렀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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