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조선의 묘지 소송
<신간> 조선의 묘지 소송
  • 승인 2012.03.0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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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지음/ 문학동네




2010년,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에 250년이나 끌어온 소송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명망 있는 두 가문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며 조정을 어지럽히자 영조는 이들을 직접 심문해 형장을 치고 귀양까지 보냈다. 그러나 두 집안은 죽음을 직면한 상황에서도 서로의 뜻을 굽히지 않고 길고긴 다툼을 이어갔다. 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왕의 진노까지 사면서 250년 동안 싸움을 계속한 것일까?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의 소송의 원인은 묏자리였다. 파평 윤씨 집안에서는 먼 조상인 고려 재상 윤관의 묘 위치를 잃어버려 옛 기록을 토대로 그의 묘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윤씨가에서 경기도 파주에서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 두어 쪽을 발견해 윤관의 묘지 위치를 재확인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위쪽에 청송 심씨 심지원의 묘가 위치했다. 윤씨가에서는 심씨가에 심지원 묘의 이장을 요구했고, 이에 심씨가에서는 백여 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수호해왔으니 이장할 수 없다고 맞선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선 윤씨가와 심씨가. 이들의 분쟁을 중재하고자 임금까지 나서지만, 단순히 묏자리 선점 문제가 아니라 조상묘를 수호하고자 하는 위선의식(爲先意識)과 가문의 사회적 위상 그리고 명예가 걸린 문제였기에 집안의 모든 구성원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소송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 이처럼 분묘 및 분묘 주변의 산지를 놓고 일어난 소송을 산송(山訟)이라 한다.

그동안 고문서를 통해 조선 후기 사회 문제 및 민인(民人)의 소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조선대학교 사학과 김경숙 교수는 『조선의 묘지 소송』에서 ‘산송’을 통해 조선 후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산송에 임했는지를 좇고, 이를 통해 친족질서의 변동, 사회경제적 변동, 신분질서의 동요, 향촌 사회 구조의 변화 등 조선 후기 사회상을 종합적으로 읽어나간다. 

정리 이주리 기자 juyu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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