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탄압에 문 닫아야했던 ‘자선냄비’의 주인공
일제 탄압에 문 닫아야했던 ‘자선냄비’의 주인공
  • 승인 2012.03.0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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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역사 현장 탐방 14 - 근대종교문화유산 2 구세군 본영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호부터는 근대에 건축된 종교문화유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각 종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과 국내 건축물 양식 변화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선 자선남비의 주체인 구세군 본영과 정동제일교회 등을 찾아봤습니다.

매년 연말이면 거리에서 익숙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붉은 옷과 종소리로 대표되는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그 것이다. 가두 자선모금운동의 대명사인 자선냄비는 189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 해안에 도착한 난파선 생존자를 위한 모금에서 냄비를 사용한 게 시초였다고 한다.

기독교의 한 일파인 구세군의 선교와 더불어 각국으로 확산됐다. 우리나라에선 1928년부터 매년 실시되고 있는데 세 다리를 가진 붉은 냄비걸이와 냄비 모양의 모금통, 제복을 입은 구세군 사관이 흔드는 종소리는 한해가 저물어 감을 알려주는 도시풍경으로 자리잡았다.


독특한 ‘군사 용어’

‘구세군’은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가 1865년 런던의 슬럼가에서 창립한 교파다. 교회로부터도 배척되기 일쑤였던 가난한 사람들과 근로자들, 그리고 부랑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 만들어졌다.




본래 ‘기독교선교회’라는 명칭에서 1878년 ‘구세군’(The Salvation Army, 救世軍)으로 바꿨다. 조직의 구조와 명칭이 군대식이고 제복을 착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동양엔 1895년 일본에 처음 전파됐다.

현재 국내에선 교세가 약해 ‘자선냄비’라는 이미지에 가려져있지만 국내에 들어온 역사는 개신교 안에서도 짧지 않다. 한국에 구세군이 전파된 것은 1907년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의 일본 순회집회 때 조선 유학생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고 1908년 10월부터 한국 선교가 시작됐다. 일제의 침략이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에서 제복과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구세군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급속한 발전을 이뤄냈다고 한다.

구세군의 첫 번째 교회인 서울 제일영(서대문 영문)이 문을 연 것도 1908년 11월이었다. 그러다 교세가 급격히 힘을 잃은 것은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탄압이 시작되면서부터다. 1941년 일본에 의해 ‘구세단’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해외 선교사들은 모두 귀국조치 당하는 등 일본 구세군에 의해 운영됐다.

1943년엔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 구세군은 강제 폐쇄조치됐고 지하교회로 그 명맥을 이어오다 해방 이후 1947년부터 사업이 재개됐다. 현재 전국 220여개의 교회와 10만여명의 교인들이 있다.



개신교의 ‘모체 교회’

구세군의 자취를 밟기 위해선 지하철 광화문역이나 시청역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 지난호에 소개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선 종로를 거쳐 광화문 광장을 가로지르면 된다.

광화문에서 출발할 경우 인근 청계천과 새롭게 조성된 광장을 먼저 둘러보는 것도 좋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쪽으로 5분 정도 걷다보면 큰 길에서 ‘새문안 교회’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새문안’이란 ‘서대문 안’쪽에 있었다는 뜻이다. 120년 전 문을 새문안교회는 국내 개신교의 모체교회로 1887년 9월 언더우드 목사의 주도로 정동의 한 한옥에서 시작됐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였던 김규식은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고아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특별한 사랑을 받아 양자가 된 후 1910년 새문안교회의 장로가 됐다.




새문안교회는 1910년 5월 22일 현재 자리에 일화 4000여원을 들여 1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벽돌 예배당을 만들었는데 60여년 동안 사용되다 1972년 개축됐다. 새문안교회에 있는 언더우드기념관 등을 둘러보고 나와 서대문쪽을 바라보면 서울역사박물관 앞으로 구세군대한본영 건물이 있다. 과거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국내 최초 ‘구세군 교회’

여기서 구세군의 옛 건물을 만나기 위해선 차도를 건너 주미대사관쪽으로 가야 한다. 길을 찾기 힘들 경우 덕수초등학교를 먼저 찾는 게 쉽다. 유서깊은 덕수초등학교 운동장엔 우리나라 첫방송터를 알리는 상징물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바로 이 곳에서 첫 방송을 했다.

덕수초등학교와 주미대사관 쪽 사잇길은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져서 산책길로도 좋다. 조금만 걷다보면 왼쪽으로 고풍스런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구세군 중앙회관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08년 국내에 처음 들어온 구세군이 사관 양성 및 선교와 사회사업의 본부로 사용하기 위해 1928년 지은 것이다. 벽돌로 쌓은 2층 건물로 1층은 사무실, 2층은 집회 및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좌우 대칭으로 된 안정감 있는 외관과 중앙을 받치는 4개의 기둥, 독특한 지붕틀이 인상적이다. 정면 중앙 상부엔 ‘구세군사관학교 1928’라는 글자가 박공벽(건물 입구 위쪽과 지붕 사이에 위치한 벽)에 새겨져있다. 영국 런던 클라톤 콩그레스 홀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건국 초창기부터 1985년까지 교역자 양성을 위한 구세군 사관학교로 사용됐으며, 한국 구세군의 얼굴인 동시에 르네상스 양식이라는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 1955년부터 1981년까진 구세군 대한본영도 겸했으며 2002년 3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됐다.

구세군 중앙회관 옆 건물은 구세군 서울제일교회다. 입구 오른쪽엔 100주년 선언 비전문과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구세군 서울제일교회는 구세군이 한국에 첫발을 내딛은 지 40일이 지난 1908년 11월 11일 ‘야주개’(현 종로구 당주동의 옛 지명)에 있는 건물을 임대했다. 한국 최초의 구세군 교회인 셈이다.




‘구세군영’(救世軍營)이라고 쓰여있는 표석은 1915년 당시 예배당에 있던 역사적인 현판이다. 구세군 중앙회관 마당에 묻혀 있는 것을 2003년 발굴했으며 2008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이 곳으로 이전했다.

표석 밑에 있는 기초석은 1915년 한성부의 도로 확장 계획으로 철거된 예배당을 재건축할 때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허가두 사관이 낙성식을 할 때 인근 새문안교회의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구세군을 비롯 장로교와 감리교 등 개신교는 서양 강국들의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기, 근대화의 과정에서 한국에 들어왔다. 하지만 일제 치하와 가난이라는 역사 현실 앞에선 그 어느 곳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리는 시기, ‘나눔’의 의미를 되새기며 서양 종교들이 이 땅에 첫발을 내딛었던 역사적 장소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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