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엄마, 남구가 다녀갔어요. 동안거(冬安居) 끝나고 속가(俗家)에 휴가를 나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유행(遊行) 중에 들른 거래요. 사실은 스님 누구누구라고, 그렇게 말해야 옳은 건데 글쎄 이게 또 입에 잘 붙지를 않네요. 머리 깎고 스님 소리를 듣기 시작한 지도 벌써 오 년차이니 이제쯤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글쎄 이게, 내 안에 보수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인지 과거에 불렀던 남구, 남구, 남구 소리만 나오고 그의 법명은 영 안 나오는 거예요.

그나저나 엄마가 기억할까? 내가 이곳 해리로 이사 올 무렵에 달려와서 집수리를 도와주었던 그 남구 말이에요. 하긴 이사 올 무렵만이 아니었지요. 이사를 완료한 뒤에도 새롭게 무슨 공사를 벌였다 하면 트럭을 몰고 와서 모래를 퍼 나르기도 하고, 목재를 사 오기도 하고, 등등 참 많이도 땀을 흘려주었어요.

그러고 보니 엄마랑 같은 방에서 잠도 잤었네 뭐.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보름이었던가, 맞아요. 적잖이 보름여 동안이나 엄마랑 같은 방에서 텔레비전도 보고 옛날이야기도 하고 그랬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남구의 꿈이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할머니들과 더불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말이에요. 그랬을 거예요. 서울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하다가 홀연 그만두고 고창으로 내려왔을 때, 그때 그의 심중을 차지한 것은 필경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것이었을 거예요.

암튼 그 남구가 말이에요. 삼 개월 여 전에 동생의 장례를 치렀다 하네요. 이름이 수달이라고, 양아버지를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으로 유명했던, 누나건 형이건 자기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던 그 동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전봇대를 들이받고 세상을 떠났다 하네요.



술이 잔뜩 취해서 논둑이니 밭둑이니 가리지 않고 오토바이를 몰았으니 속도감도 거의 느끼지를 못했겠지요. 그러다가 전봇대를 받았으니 그 충돌의 파장이 얼마였을까, 상상이 잘 안 되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어요. 내가 이미 자동차로 전봇대를 받아본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때 시속 이십 정도에서 안전벨트를 매려고 하다가 전봇대를 받은 것이고, 그래서 별다른 큰 상처 없이 살아날 수 있었지만 그 녀석은 글쎄, 보나마나 술 취한 김에 그냥 내달렸겠지요. 그렇게 거대한 전봇대와 부딪혔으니 살아나기가 어려웠겠지요.

“형님, 부끄럽게도 저는 이제야 눈을 조금 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동생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캄캄한 미망 속을 헤매고 있겠지요.”

동생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난 뒤에 남구가 그러더라고요.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잿빛 승복 차림에 삭발한 머리가 번들번들 빛나는 그런 몸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 참, 그때의 내 마음상태를 뭐라고 해야 하나, 가슴이 졸아드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남구의 가정사를 내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겠지요.
시골에서 조용히 농사일 하며 소설을 써보겠다던 남구가 느닷없이 머리 깎고 중이 된 것은 순전히 죽은 그 동생 때문이었으니까요. 날씨가 한참 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의 어느 하루 밤중에 술 취한 동생에게 얻어맞고 있는 형을 생각해봐요.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플라스틱 슬리퍼를 질질 끌며 산속으로 도망가는, 추수가 끝난 뒤의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시골 버스 정거장에 쭈그려 앉아 있는 한 사내를 생각해봐요.

그렇게 머리를 깎았던, 그렇게 ‘중’이 되었던, 그렇게 세속을 떠나버렸던 남구가 오 년여의 세월이 지난 오늘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야 뭔가를 알겠다는 느낌이 있다고 말이에요. 비명횡사한 동생의 장례를 치르던 날 그의 어머니가 그러셨다더군요.

“내가 죽일년이다, 에미가 죽일년이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어야.”



해서는 안 될 일. 그래요. 엄마, 남구의 가정사는 아주 복잡해요. 그리고 그 복잡함은 우리의 현대사와도 관련이 있어요.
남구 엄마가 열여섯에 결혼을 하셨다더군요. 얼굴도 모르는 채 결혼을 했는데 땅뙈기 하나 없는 아주 가난한 집이었대요.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결혼하고 일 년 뒤에 딸이 태어났는데 어린 딸의 백일도 지나기 전에 남편이 끌려가다시피 군대를 가게 되었다네요. 이때부터 남구 엄마의 고군분투라고나 할까, 지독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거예요.
땅뙈기 하나 없는 집에서 여자가 혼자 딸을 키우며 살아간다는 거, 전쟁이었겠지요, 당연히. 아무리 농촌이라지만 자기 땅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도 젖먹이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여자의 입장에서는 전쟁도 그런 피눈물 쏟아지는 전쟁이 없었을 거예요.

아이 때문에 남의 집 품팔이도 나가기 어려운 남구 엄마가 선택한 전쟁의 방식은 개간이었다네요. 삽 한 자루, 곡괭이 하나, 조선낫 한 자루를 들고 산으로 가서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파고 돌멩이를 골라낸 뒤에 씨앗을 뿌리는, 풀을 베어서 똥오줌과 섞은 뒤에 썩혀서 거름으로 쓰는, 굳이 비유를 하자면 ‘맨땅에 헤딩’하는 방식의 그런 삶과의 전쟁을 삼 년쯤 하고 나니 세상에, 밭이 열 마지기 가까이나 만들어져 있더라네요. 그 즈음에는 남편도 제대를 했고요.

남편이 제대하면서 아이가 또 생겼겠지요. 말하자면 남구가 태어난 거예요. 그리고 얼마 뒤에 여동생이 태어나고, 다시 남동생이 태어나고, 그렇게 식구가 자꾸 불어나니까 억척스런 아낙네 남구 엄마의 마음에 다시 그늘이 생기기 시작했겠지요. 게다가 그 무렵에는 땅 주인이 소작료를 내놓으라는 으름장을 놓고 있었으니까요. 세상에, 생각해봐요. 잡목이 우거진 산에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파서 밭으로 일궜는데 산 주인이 자기 땅이라고 소작료를 내라고 하는 상황이 말이에요. 산 주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권리주장이겠지만 땅을 일군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이거든요.
그래서 아마 그러셨겠지요. 이놈의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이런 궁리 저런 궁리 많은 궁리를 하셨겠지요. 그런 참에 들어온 제안이 역전여인숙이었다나 봐요. 먼 친척이 정읍역 앞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다가 병이 들었는데 후계자(?)를 물색하다가 남구 엄마를 생각해냈던 거래요.



여인숙이라는 데가 그저 여행객들 잠자리 편의를 제공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남구 엄마는 “오매 이것이 뭔놈의 복덩어리다냐”하고 그냥 받아들이셨던가 봐요. 왜냐하면 여인숙을 운영하는 그 먼 친척의 생활이 아주 윤택했으니까요. 그래서 시골 살림을 몽땅 정리하고 그 여인숙을 월세로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마치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부랴부랴 이사를 한 뒤에서야 여인숙의 실체(?)를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었던 것이지요.

여인숙, 그것도 역전여인숙,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깡통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한 이십 년쯤 된 것 같아요. 여름이었던가, 초가을이었던가, 하여튼 텐트를 준비해서 여행 중이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숙박업소를 찾았단 말이거든요. 여관보다는 여인숙이 가격면에서 훨씬 헐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여인숙을 찾았던 것인데 말이에요. 일언이폐지하고 뭐 그냥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들어갈 때부터 주인아줌마가 “아가씨는 어떻게?”하고 반말 비슷한 투로 묻더니 한 시간 단위로 찾아와서 같은 질문을 하는 거예요. 게다가 앞방 그리고 옆방에서 들려오는 그 지독한 시끄러움이라니. 술 취한 남자의 고함소리와 여자들의 비명소리, 슬리퍼짝을 질질 끌고 달아나는 발자국 소리가 뒤섞여서 춤을 추는데 말이에요. 소음을 막자고 귀에 이어폰을 꽂아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바로 그런 여인숙에서 남구네 여섯 식구가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남구의 그때 나이가 아홉 살이었고, 남동생이 여섯 살, 두 형제는 틈만 나면 아버지 모르게, 그리고 어머니 모르게 돌아다니며 창호지 문짝에 구멍을 뚫고 방안을 엿보는 놀이에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는군요. 가끔은 누나와 여동생까지 합류를 했었고요. 그런 생활이 한두 해도 아니고 오 년이었다나 봐요.



하긴 남구 어머니도 그리 쉽게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나마 오 년여 만에 그만둔 것도 대단한 결심이 아니고서는 어려웠을 테고요. 아무튼 오 년 만에 여인숙을 그만두고 서울로 이사를 했다는 거예요. 서울 모래네 시장에서 야채장사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숭인동 산비탈에 작은 집 한 채를 사서 반찬가게 등을 하셨다는데요. 그 대목을 얘기하면서 남구는 또 눈물을 글썽이더군요.

“그래봐야 이미 늦었던 거죠. 악성 바이러스라고나 할까. 그런 것들이 우리 사남매의 영혼을 다 먹어치우고 변종바이러스를 만들어 버리고 있었으니까요.”남구의 얘기로는 그랬어요. 철없던 시절에 보았던 역전여인숙에서의 장면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생생하게 뚜렷하게 생각나더라는 거예요. 그 바람에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역전여인숙에서 보았던 여자들과 똑같은 ‘몸 파는 여자’들로 보이더라는 거예요. 심지어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재혼한 어머니까지도 말이에요.

그러니까 남구의 이야기인즉 이런 거였어요. 남자 형제들은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창녀로 인식하고 있었고, 여자 형제들은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믿을 수 없는 날건달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 형제들은 결혼과 이혼을 밥 먹듯이 하게 되었고, 남자 형제들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여자친구 한 명 가져볼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나마 남구 자신은 문학에 취미가 있어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지만 남동생 수달이는 중학교 때부터 청계천을 드나들며 포르노 장사를 하는 등 완전히 그 세계로 빠져들었다는군요.

남구의 원래 꿈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국문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나 봐요. 석사 논문을 썼을 때의 평가도 아주 좋았고요. 그래서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세계의 관행적인 악습을 보고 말았다는군요. 교수가 되고자 하는 자는 교수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면서 환멸이 느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학원을 중단하고 고창의 외가댁으로 와 버렸던 거예요.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소설이나 써 보겠다는 생각으로 말이에요.



이렇게 해서 남구네 가족의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는데요. 그 과정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해요. 남구의 어머니가 말이에요. 당신의 마지막 희망을 남구에게 걸고 있었던 어머니가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몽땅 털어서 시골에 커다란 집을 사고 땅도 사고 해서 남구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버린 거예요. 그것은 결코 남구가 바란 것이 아니었지만 이게 또 거절하는 것 자체가 아주 어려운 일이었어요.

원치도 않은 집과 땅을 갖게 된 남구, 그는 점점 난감한 상황에 몰리게 되는데요. 청계천에서 포르노 장사를 하며 감옥을 안방처럼 드나드는 남동생 수달이가 형 보기를 ‘양아치’ 대하듯 하며 드나들기 시작한 거예요. 이에 불안을 느낀 어머니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오셨고, 뒤를 이어 여동생이 내려왔고, 이렇게 해서 가족 모두가 다시 시골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머리가 클 대로 커버린 수달이의 완력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방법은 없었지요.

수달이에게도 나름의 꿈이 있었던 거예요. 그 꿈이라는 것이 어이없게도 ‘여자 장사’를 크게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는데요. 시골의 땅과 집을 팔면 그 돈으로 그 장사를 할 수 있다고, 일 년 안에 본전을 뽑아서 땅과 집을 다시 사 줄 테니 당장 자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남구 어머니가 들어줄 까닭이 없고 보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이 없는 남동생 수달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던 거예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것. 이런 생활이 무려 오 년이었어요. 남구는 일찌감치 동생의 폭력을 피해서 머리 깎고 출가해 버렸지만 어머니와 양아버지 그리고 여동생은 내일이면 나아질까, 한 달 뒤에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참으로 암울한 희망 하나만으로 폭력의 세월을 견뎌 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녀석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예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느 하루 그냥 죽어버린 거예요. 술 취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전봇대를 들이받는 일이야 가끔 있는 일이라지만, 그 어머니에게는 온갖 회한이 밀려올 수밖에 없는 죽음이었겠지요. 그래서 그 울음의 깊이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내가 죽일년이다. 에미가 죽일년이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어야.”

제아무리 발등에 불이 뜨겁다 해도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정도는 구분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놓쳤다는, 그런 지혜가 없었다는 통한의 눈물이었다고나 할까, 그날의 상황을 전해주는 남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내 마음이 참 그렇더라고요. 아무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눈물이 글썽한 남구의 얼굴을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어요. 그러자 녀석이 나를 위로하고 나서더군요.



“형님, 제 마음은 지금 비교적 평온합니다. 이게 다 죽은 동생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생이 아니었다면 제가 출가를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남구의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서양의 어느 철학자가 생각나더군요. 히틀러의 광기 때문에 인류사의 중요한 본질 같은 것을 깨치게 되었다는 철학자가 말이에요. 엄마. 그곳에서 혹시 죽은 남구의 동생을 만나거든 이런 말 한 마디만 해주세요. 너는 네 몫의 삶을 살았던 거다. 이제 다른 몫의 삶을 준비하거라, 하고 말이에요.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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